성리학의 확산과 영향
조선의 성리학과 사림 세력의 성장
고려는 13세기 말 원으로부터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성리학의 수용에는 안향의 역할이 컸다. 고려 후기에 등장한 신진 사대부는 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아 불교 사원 및 그와 결탁한 권문세족의 횡포를 비판하고 사회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신흥 무인 세력과 힘을 합쳐 조선을 건국하였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성리학은 국가의 통치 이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 의례와 사회 의례의 기준이 되었다.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양반 관료가 중심이 되어 국가를 운영하였다. 이들은 주요 관직을 독점하고 경제적 부를 축적하면서 점차 세습적인 특권층으로 자리 잡았다.
16세기 들어 조선 사회가 점차 안정되면서 지방을 기반으로 사림 세력이 성장하였다. 사림 세력은 지방에 서원을 세워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최초의 서원은 백운동 서원이며, 이후 지방 곳곳에 서원이 건립되었다. 또 향약은 중종 때 처음 시행되었고, 선조 때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향촌 사회에 성리학적 사회 질서가 점차 자리 잡았다.
성리학에 대한 학문적 이해도 더욱 깊어졌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우주론과 인간의 심성 문제 등을 토론·논쟁하며 성리학을 발전시켰다. 특히, 사단과 칠정은 구별되는가, 사람과 동물의 본성이 같은가를 따진 논쟁은 성리학에 대한 이해 수준을 크게 높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특정 학자를 중심으로 학설이 계승되면서 학파가 형성되었고, 학파는 이후 붕당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황과 이이가 학파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황은 도덕적 행위의 근거로서 인간의 심성을 중시하였는데, 그의 사상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전해져 에도 시대의 성리학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이이는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한 통치 체제의 정비와 수취 제도의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조선에서 성리학의 확산과 사회 변화
명과 조선에서는 성리학이 보급됨에 따라 『주자가례』에 따른 유교적 관혼상제의 의례가 확산되고 성리학적 윤리가 강조되었다. 조선 중기까지 혼인 후 남자가 처가에서 사는 풍습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적 윤리가 확산되면서 여자 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곧바로 남자 집에 가서 시집 살이하는 결혼 풍습이 널리 보급되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관직에서 물러나 삼년상을 지내야 했다. 또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집안에 가묘나 사당을 세우는 일이 일반화 되었다.
적자가 있으면 지손(支孫)이 제사를 받들지 못하는 것이 마땅한 예임에도 자기 어버이의 기일을 맞아 각 집에서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런 풍속은 예법에 지극히 어긋나는 것이므로 마땅히 금하도록 하소서.
- 『중종실록』 -
자손이 돌아가면서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풍습도 장자 중심의 제사로 바뀌었다. 이와 더불어 재산 상속도 장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아들이 집안의 대를 잇는다는 관념이 강해지면서 아들이 없으면 동족 중에서 양자를 들이는 일이 일반화되었다.
일본의 무사
일본의 무사는 헤이안 시대 후기 이래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갔다. 마침내 12세기 말에는 가마쿠라에서 무사들의 독자성을 반영한 정치 체제가 구축되었다. 이로써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되었다. 막부는 무사 정부를 가리키는 말로, 그 최고 수장을 쇼군(장군)이라 불렀다. 가마쿠라 막부는 쇼군과 주종 관계를 맺은 유력 무사를 슈고와 지토로 지방에 파견하여 전국을 통제하였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슈고가 점차 무사와 토지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여 봉건 영주(다이묘)로 성장하였다. 16세기 말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농 분리 정책을 실시하여 무사층이 점차 신분적으로 고정되어 나갔다. 이후 무사는 일반 백성 위에 군림하는 지배층의 성격이 뚜렷해졌다.
에도 시대의 무사는 막부의 강력한 통제 아래 놓였다. 또 오랫동안 평화가 계속되면서 이전 시기의 무사와 달리 전투에서 점차 멀어졌다. 그 대신 ‘문’의 담당자를 자처하며 관료와 지식인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편 막부가 지배하던 시기에도 교토에 천황이 존재하였다. 하지만 현실 정치에는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 채 종교의식이나 학문, 예술 등에 관여하였다.
일본 성리학의 발전
가마쿠라 막부 후기 무사가 지배하던 일본에도 성리학이 전해졌지만, 사회 전반에까지 확산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성리학은 무로마치 시대 한문 지식을 바탕으로 대외 관계를 담당하던 일부 선종 승려를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승려였던 후지와라 세이카는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 온 조선의 강항을 만난 후 유학자로 변모하였다. 그는 강항의 도움을 받아 일본 최초로 사서오경 주석본인 『사서오경왜훈』을 간행하였다.
그의 제자 하야시 라잔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등용되어 에도 막부의 각종 제도와 의례를 정비하는 데 공헌하였다. 야마자키 안사이는 일본 성리학을 집대성하면서도 신토와 유교의 결합을 추구하였다.
에도 막부는 성리학을 관학으로 삼아 적극적으로 보호하였 다. 이는 사농공상의 신분적 차별을 인정한 성리학이 무사 중심의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사회는 신분을 세습하는 무사들이 지배층을 이루고, 유학 경전을 시험하는 과거제도 시행되지 않았다. 또 불교와 신토의 영향력이 컸던 일본 사회에서 성리학은 사회 전반에 깊게 뿌리내리지 못하였다. 유교적 가묘가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문묘로 유시마 성당이 세워졌으나 국가적 제도로는 자리 잡지 못하였다. 관혼상제를 비롯한 각종 의례도 신토나 불교에 따라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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