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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성리학의 성립과 확산

성리학의 성립과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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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의 성립과 확산

 

사대부의 등장과 성리학의 성립

     송 대에는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전시 제도를 도입하는 등 과거제를 엄격하게 시행하여 황제 중심의 문신 관료 체제가 성립되었다. 이에 따라 세습적인 귀족이 몰락하고 글공부를 많이 한 지식인이 관료가 되어 사대부라는 새로운 지배층이 형성되었다.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된 사대부들은 보통 지주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유교적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였다.

조정의 높은 지위에 있을 때는 백성을 위해 근심하고, 물러나 멀리 초야에 있을 때는 군주를 위해 근심한다. …… 천하의 근심에 앞서 근심하고 천하가 모두 즐거워한 다음에 즐거워한다.
- 범중엄, 『범문정공집』 -

 

     사대부가 지배층이 되자 유학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한 대 이후 유학에서는 경전의 자구를 해석하는 데 치중한 훈고학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수·당 대를 거치며 불교와 도교 사상의 영향을 받아 북송 시기에 우주 원리와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신유학이 대두하였다.

     남송의 주희는 신유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그는 만물의 근본 원리인 ‘이(理)’를 중시하였다. 특히 인간이 하늘로부터 받은 본질인 ‘성(性)’이야말로 모든 인간과 자연의 본질인 ‘이’와 같은 것이라 이해하여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인간 본성을 회복하기 위한 실천적 수양 방법으로 ‘거경궁리’와 ‘격물치지’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주희의 학문을 주자학 또는 성리학이라고 한다. 주희는 유학의 경전으로 중시되던 오경보다 사서인 『대학』, 『중용』, 『논어』, 『맹자』를 더 높이 평가하고 여기에 주석을 달았다. 주희가 주석을 붙인 『사서집주』는 이후 유학자에게 절대적 권위를 지닌 책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주희는 가정에서의 예절을 모아 엮은 『주자가례』를 저술하였고, 그의 지시에 따라 어린아이를 위해 성리학의 기본 개념, 수행 방법과 예절을 담은 『소학』이 편찬되었다.

     한편, 성리학의 바탕이 되는 성선설과 천명사상 등을 주장한 맹자가 공자와 더불어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성리학은 동아시아 각국에 퍼져 충・효・예의 가치관을 전파하고, 인간과 자연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심화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한편 성리학이 등장할 무렵 송은 요와 금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에 한족의 민족의식이 높아지면서 성리학에서는 다른 민족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을 바탕으로 한 화이관,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대의명분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성리학을 통해 조선과 일본에도 전해졌다. 조선에서 병자호란 이후 일어난 북벌론과 19세기의 척화론, 일본의 존왕양이론 등은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성리학의 발전과 신사층

     남송 이후 전국적으로 서원과 향약이 보급되었다. 서원은 성현의 제사와 후학 양성을 위해 세워진 사설 교육 기관이다. 성리학자들은 서원을 기반으로 지역 여론을 주도하고, 상부상조의 정신과 유교 윤리를 결합하여 만든 향촌의 자치 규약인 향약을 통해 성리학적 윤리가 백성에게도 확산되었다.

     명은 민간에 유학 이념을 적극적으로 보급하는 한편, 성리학을 관학으로 삼아 대규모 국가사업으로 『영락대전』을 편찬하였다. 이 책들은 교육과 과거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녔으나, 성리학의 해석이 경직되는 문제를 낳기도 하였다.

     명은 과거제를 재정비하면서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만 과거 응시 자격을 주었다. 이들처럼 과거 응시 자격이 있거나 과거에 합격한 자, 그리고 관직 경력자들을 신사라고 불렀다. 신사층은 유력자로서 요역을 면제받으면서 지방관 못지않은 세력을 가지고 명·청 대 향촌 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다.

 

 

 

 

 

양명학의 발전

     명 대 성리학이 과거 합격만을 위한 학문으로 여겨지고, 도덕적 통치를 위해 강조되며 사회 모순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양명학이 발전하였다. 남송 때 육구연은 ‘이’는 자신의 마음에 있다는 ‘심즉리’를 주장하며 성리학의 ‘성즉리’를 비판하였는데, 육구연의 영향을 받은 명 대의 왕수인이 양명학을 집대성하였다. 왕수인은 ‘심즉리’와 함께 굳이 배우지 않아도 타고난 도덕적 자각인 ‘양지(良知)’를 통해 사물을 바르게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실천을 중시하여 ‘지행합일’을 주장하였다. 그의 사상은 사대부뿐만 아니라 서민에게도 큰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지나친 공리공론으로 흐르는 폐단도 나타났다. 

     양명학은 일본에서는 추상적 지식보다 구체적 행동을 중시하는 무사에게 영향 을 주었다. 조선에서 양명학은 성리학자에게 이단으로 배척당했지만, 소수의 학자를 중심으로 연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