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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16세기의 동아시아

16세기의 동아시아 

 

썸네일 - 16세기의 동아시아
16세기의 동아시아

 

북로남왜와 명의 쇠퇴

     명은 건국 후 주변국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주도하였다. 하지만 15세기 중반 북쪽의 몽골이 남하하여 명의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토목보의 변). 명은 이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다시 축조하였으나, 16세기 중반에는 만리장성을 넘어 수도인 베이징을 포위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 무렵에는 왜구가 중국의 동남 해안 지방을 자주 침입하였다. 무로마치 막부의 힘이 약해지면서 중앙의 통제가 느슨해지자 왜구의 활동이 다시 활발해진 것이다. 이 시기의 왜구를 후기 왜구라고 하는데, 전기 왜구와 달리 동중국해와 동남아시아 지역까지 영역을 확장하여 약탈을 일삼고 밀무역에 간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명은 북쪽의 몽골과 동남쪽의 왜구, 이른바 ‘북로남왜’에 시달리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명은 내부적으로도 부패한 환관과 당쟁으로 정국이 불안하였고 향촌 질서가 해체되어 국가의 기틀이 크게 흔들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용된 장거정은 국정을 쇄신하고 재정을 확대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밖으로는 몽골 세력과 강화를 맺고, 안으로는 환관 세력을 억제하였다. 행정 개혁을 통해 경비를 절감하고 세금을 은으로 내게 하는 일조편법을 시행하여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장거정 사후 관료와 신사층이 개혁에 반기를 들고 환관 세력이 다시 대두하면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고 국력은 점차 쇠퇴하였다.

 

북로남왜 이미지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조선 전기의 대일 관계

     조선은 건국 이후 사대교린을 외교의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명과는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사대 외교를 펼쳤으며, 일본을 비롯한 주변의 여러 나라와는 교린의 입장 속에서 외교 관계를 맺었다. 조선은 고려 말 이후 계속된 왜구의 침략을 근절하기 위해 세종 때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를 공격하여 왜구의 힘을 약화시켰다. 이와 함께 일본과 계해약조를 맺고 제한된 교역을 허용하였다. 이처럼 건국 초부터 지속한 교린 외교의 결과 고려 말, 조선 초에 극성을 떨쳤던 왜구는 점차 잠잠 해졌다.

     하지만 교린 외교로 안정된 조선의 대일 관계는 16세기 이후 점차 악화하였다. 쓰시마의 무역 요구가 늘어난 데 대해 조선 정부가 통제를 강화하자, 왜인들은 삼포 왜란(1510)과 을묘왜변(1555) 등 소란을 일으켜 두 나라의 무역이 일시 중단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에서는 성종 이후 지방에서 성장한 사림 세력이 중앙 정치 무대에 새롭게 등장하여 정권을 잡고 있던 훈구 세력과 충돌하였다. 16세기 후반 훈구 세력을 물리치고 정권을 잡은 사림 세력은 붕당을 형성하여 서로 대립하였다. 또 대지주의 토지 겸병 등으로 농민이 몰락하면서 군에 복무할 인원과 전세 수입이 감소하였다. 이에 농민에게 부과하던 군역 대신 군포를 받아, 그것으로 군인을 고용하고자 하였다. 결과적으로 군적에 등록된 인원은 15세기에 비해 크게 줄지 않았으나, 실제 동원할 수 있는 군인은 매우 적었다. 

     이렇게 정쟁이 계속되면서 조선은 주변의 정세 변화와 대외적 위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였다. 또한 건국 이래 오랫동안 평화가 계속되고, 군역 제도의 운용 과정에서 폐단이 나타나면서 국방력이 약해졌다.

 

 

 

 

센고쿠 다이묘의 등장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15세기 중엽 무로마치 막부 쇼군의 후계자 선정을 둘러싸고 오닌의 난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막부와 쇼군의 권위가 실추되고, 각지에서 자신의 영지를 독자적으로 지배하는 센고쿠 다이묘가 출현하였다. 센고쿠 다이묘는 계속된 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부국강병책을 모색하였고, 대외 교역에도 관심을 보였다.

     센고쿠 다이묘들의 치열한 각축 속에서 16세기 중엽 오다 노부나가가 두각을 나타냈다. 오다 노부나가는 포르투갈로부터 전해진 새로운 무기인 조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적대 세력을 물리쳤다.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그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마침내 100여 년에 걸친 센고쿠 시대를 통일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현지에 직접 관리를 파견하여 토지를 조사하고 토지의 단위와 도량형을 통일하였다. 또 농민의 무기 소유를 금지하여 농민이 무사 신분으로 상승하는 것을 막았다. 이로써 센고쿠 시대를 풍미한 하극상 풍조가 사라지고 신분 이동이 제한되었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근거지인 오사카에 대규모 성을 쌓고 무사들을 이주시켰다. 이처럼 무사와 농민의 거주 지역을 신분에 따라 구분하는 병농 분리 정책은 에도 막부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