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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전후 동아시아 사회의 변화

전후 동아시아 사회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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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동아시아 사회의 변화

 

왜란 후의 동아시아 

     전쟁을 전후하여 동아시아 삼국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임진왜란의 위기를 넘긴 조선에서는 성리학적 이념에 따른 질서의 재편이 진행되면서 양반 사대부의 지배 체제가 더욱 확고해졌다. 외적의 침입을 계기로 사회의 여러 모순이 덮이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재건의 기회도 주어졌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의 지배층은 명의 참전을 '재조지은'으로 받아들이며 명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였다. 

     명은 전쟁에 따른 재정 부담으로 경제가 어려워지고, 환관과 사대부의 정쟁 등으로 정치가 어지러워졌다. 이에 각지에서 농민이 봉기하였으며, 결국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 봉기군에 의해 멸망하였다(1644).

     16세기 후반 만주에서는 명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이 점차 세력을 키워 갔다. 누르하치는 명과 조선이 일본과 전쟁하는 기회를 틈타 다른 여진 부족을 복속하고, 1616년에 후금을 건국하였다. 이후 그는 요동을 포함한 만주 전역을 장악하였다. 

     일본에서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군사력을 보존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는 쇼군에 올라 에도에 막부를 열었다(1603). 

 

 

 

 

명・청 교체와 동아시아 국제 질서

     청의 성장으로 명과 청의 패권 다툼이 격화되었다. 그러나 이자성의 농민 반란으로 명이 멸망한 직후, 청은 산하이관을 지키던 명의 장수 오삼계에게 항복을 받았다. 그리고 베이징을 점령한 청은 중국 각지를 정복한 후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반청 세력의 근거지인 타이완을 복속하였다. 또한 주변국과 조공·책봉 관계를 계승하여 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확립하였다.

     명·청 교체 이후 동아시아 각국에서는 사상적 변화가 나타났다. 청은 만주족의 중국 정복을 합리화하기 위해, 인의나 오륜 등의 유교적 가치를 지키면 어느 민족이나 중화가 될 수 있다는 문화적 화이론을 주장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만주족의 청은 명을 계승한 새로운 중화를 자처하였다.

     조선에서도 ‘조선이 중화의 문명을 계승하였다.’라는 조선 중화주의가 등장하였 다. 이 역시 지리적·종족적 요소를 배제한 문화적 화이론이었다. 일본의 에도 막부에서는 무력을 중시하는 사상과 함께 만세일계의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이야말로 가장 우월한 나라라는 자국 중심 사상이 나타났다.

 

 

 

 

전쟁을 통한 인구와 문물 교류

     전쟁 시기에는 군인이나 유민의 이동, 포로의 강제 이주 등을 통해 문물 교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일본은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조선에서 성리학자와 도공 등 약 10만여 명을 포로로 끌고 갔다. 또 서적과 금속 활자 등을 비롯한 각종 문화재를 약탈하였다. 이렇게 끌려간 학자와 기술자, 그리고 약탈당한 문화재는 에도 시대에 일본의 학문과 도자기, 인쇄술이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한편 일본 장수였던 사야카(김충선)를 비롯하여 전쟁 중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도 1만 명에 달하였다. 이들은 조선에 조총 제작과 사격 기술을 전해 주었다.

     조선에는 전쟁을 전후하여 담배를 비롯한 새로운 작물이 전해졌다. 담배는 상품 작물로 널리 재배되었고, 이에 따라 연초 산업이 발달하였다. 청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 세자는 독일 선교사 아담 샬과 교류하고, 천문학과 천주교에 관한 책 등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이는 조선이 서양 문물을 접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일본의 에도 막부는 명과 외교 관계를 개선하려 하였으나 명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조선에도 국교를 요청하였다. 조선은 북방에서 서서히 세력을 강화해 가는 여진을 의식하여 에도 막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에도 막부의 요청에 따라 사절단으로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약 200년 동안 12회에 걸쳐 파견된 통신사는 양국 우호 관계의 상징이 되었다. 에도 막부는 통신사를 문화 교류와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 데에 이용하였다.

     정묘·병자호란으로 1000만 명가량의 조선인 중 50만 명가량이 후금(청)에 잡혀 갔다. 청에 잡혀간 조선인 후손 가운데 일부는 청의 문화계에서 유력 인사로 활동하거나 조선과 청 사이에 발생하는 외교상의 마찰을 줄이는 데 공헌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유재란 당시 관우를 섬기는 중국인의 신앙이 조선에 유입되었다. 중국인의 조선 이주도 활발하였는데 명의 멸망 즈음에는 이여송, 진린 등과 같은 명의 무장 후손이나 호안국, 문천상과 같은 송 대 저명 관료의 후손 등 많은 중국인이 조선으로 이주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매년 조공 사절단으로 연행사를 보내 청과의 외교 관계를 지속하였다. 연행사는 황제나 황후의 생일 축하, 새해 인사, 왕의 사망이나 즉위 통보 등 여러 목적으로 청에 파견되었다. 조선의 지배층은 한동안 반청 의식이 강하였으나, 연행사 등을 통하여 첨차 청의 문물을 접한 후 북학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천리경을 비롯한 천문 기구와 서양의 역법이 전래되어 천문학 발달에 영향을 끼쳤다. 

 

연행도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