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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유럽인의 진출과 동아시아의 은 유통 확대

유럽인의 진출과 동아시아의 은 유통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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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의 진출과 동아시아의 은 유통 확대

 

유럽인의 아시아 진출과 교역망의 확대

     신항로 개척 이후 유럽 상인들이 동남아시아에 본격적으로 몰려들었다. 14세기 이후 동남아시아는 유럽과 인도, 동아시아를 잇는 무역의 요충지로 떠올랐다. 유럽인은 향신료를 얻기 위해 아시아에 진출하였다. 특히 말레이반도에 있는 믈라카는 해상 교통로의 요충지였다. 포르투갈은 1511년에 이곳을 점령하고 호이안과 마카오를 거쳐 나가사키에 진출하여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였다. 명의 상인도 이곳으로 건너와 차, 비단, 도자기 등을 판매하였다. 이로써 유럽과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국제적인 교역망이 형성되었다.

     에스파냐인도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였다. 이들은 1571년에 필리핀을 점령하고 무역 기지를 건설하였는데, 그중 마닐라는 갈레온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에스파냐인은 멕시코의 아카풀코에서 가져온 은으로 명의 비단과 도자기, 면직물 등을 사서 유럽에 팔았다.

 

갈레온 무역, 갈레온선 이미지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16세기 말 이후에는 네덜란드인이 점차 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1627년 타이완을 점령하여 식민지를 건설하고 쌀과 설탕 등을 생산하여 판매하였고, 17세기 중엽에는 바타비아(오늘날의 자카르타)를 주무대로 삼아 활동하였다. 네덜란드인은 중국의 생사·비단·도자기와 동남아시아의 향신료를 구매하고 유럽의 은화로 값을 지불하는 중계 무역을 주도하였다. 또 말루쿠 제도의 지배권을 포르투갈로부터 빼앗고, 나가사키에 머물며 일본과 유럽 간의 무역을 장악하였다.

     한편 명의 부분적인 해금 완화 조치 이후 중국인이 동남아시아에 활발하게 진출하였다. 이들이 화교의 한 갈래를 형성하였다. 중국 상인은 자국산 비단과 도자기 등을 싣고 베트남의 호이안으로 가서 그곳의 소금·계피·금 등과 바꾸었다. 17세기 초에는 1만 명이 넘는 중국인이 필리핀의 루손섬으로 건너갔다. 이들은 중국산 생사·비단·칠기 등을 에스파냐인에게 팔고 멕시코에서 건너온 은을 대가로 받았다.

 

은의 유통 지도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명・청 대 은 유통의 확대

     명 초에는 동전과 지폐인 보초가 화폐로 사용되었다. 대체로 보초는 고액 화폐로, 동전은 소액 화폐로 유통되었다. 그런데 명 조정이 보초를 남발하여 그 가치가 하락하자, 민간에 보초를 대신할 새로운 고액 화폐가 필요해졌다. 이에 새로운 고액 화폐로 등장한 것이 은이었다. 은은 실물 화폐였으므로 가치가 하락할 위험성이 적었다. 상업이 발달한 창장강 하류 삼각주 지역을 중심으로 민간에서 은이 고액 화폐로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보초 이미지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상품 경제의 발달과 은 경제의 진전으로 세금의 항목과 중류가 증가하자, 명은 조세와 요역 항목을 통합하고 이를 토지와 면적과 장정 수에 따라 은으로 내게 하는 일조편법을 시행하였다. 이로써 은이 사실상 명의 공식 화폐로 자리 잡게 되었다. 청에서는 요역 항목의 인두세인 정세를 토지세인 지세에 포함시켜 은으로 세금을 징수하는 지정은제를 시행하였다. 세금을 은으로 내면서 은의 수요가 더욱 늘어났고, 16세기 이후에는 서양의 규격화된 은도 유입되어 유통되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대부분 동전을 사용하던 농민들은 해마다 세금을 내기 위해 동전을 은으로 바꾸어야 했다. 그러나 은과 동전의 교환 비율은 늘 변했기 때문에 은값이 폭등하면 농민들은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명·청 대에 사회와 경제가 안정되면서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하자 은의 수요가 더욱 늘어났다. 그러나 중국에서 자체적으로 생산되는 은만으로는 은 수요를 충족할 수가 없었다. 그 수요를 메운 것이 아메리카 대륙과 일본의 은이었다. 아메리카 대륙과 일본에서 생산된 은이 비단과 도자기로 대표되는 명·청의 상품과 교환되는 형태로 중국에 계속 유입되었다.

 

 

 

 

동아시아 은 유통망 속의 조선

     16세기 이전 조선은 은을 화폐로 이용하지 않아 은 수요가 적고 은광 개발에도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명에서 생산된 비단 수요가 증가하면서 그 대금으로 지불하는 은 수요가 늘어났다. 이에 조선은 일본에 인삼을 판매하고 그 대금으로 받은 은을 명에 비단 값으로 지불하였다. 이리하여 은은 동아시아 세계 내부의 국제 교역을 뒷받침하는 화폐로 널리 사용되었다.

     17세기 중반 이후 조선은 청에 끌려간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한 몸값으로 은이 필요하였다. 또 청과의 교역이 늘어나자 은의 수요가 늘어났다. 이에 조선은 단천을 비롯하여 각지의 은광을 본격적으로 개발하였다. 17세기 말에는 70여 곳의 은광이 개발되었고,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몰래 채굴하는 잠채도 행해졌다.

 

 

 

 

일본과 아메리카 은의 유통

     명에 은을 주로 공급한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16세기 초 조선에서 들여온 회취법을 활용하여 은을 본격적으로 생산하였다. 특히 이와미 은광이 개발되면서 본격적인 은광 개발 시대가 열렸다. 센고쿠 다이묘들은 경쟁적으로 은광 개발에 나섰다. 16세기 말에는 전 세계 은 산출량의 3분의 1을 일본산 은이 차지할 정도였다.

     일본의 은은 생사·비단·약재의 대금으로 쓰이면서 중국으로 유출되었다. 조선의 인삼을 구입하기 위한 은 유출도 많았다. 인삼 대금으로 지불된 일본 은은 교토에서 출발하여 오사카와 쓰시마를 거쳐 부산으로 건너와 한양에 유입된 후 조선의 대청 무역 대금으로 지불되었다. 이로써 교토를 출발지로 하고 한양을 중계지로, 베이징을 종착지로 하는 동아시아 은의 국제 유통로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초 점차 은이 고갈되자 에도 막부는 인삼을 자체적으로 재배하는 정책을 시행하여 은의 유출을 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