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대외 교역
동아시아의 조공 무역과 해금 정책
명이 건국된 후 명과 조선, 일본, 류큐 사이에 조공 무역이 이루어졌다. 명 초 영락제 때부터 시작된 정화의 원정으로 동남아시아는 물론 멀리 아프리카 일부 국가가 명에 조공하기도 하였다. 조공 무역을 통해 명은 주변국을 통제하려고 하였으며, 주변국은 명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명은 조공 무역을 지속하기 위해 바다를 통한 사무역을 봉쇄하였다. 이러한 명의 해금 정책으로 자유 무역이 불가능해지자, 은과 동전, 생사와 비단 등의 물품을 구하려는 명과 일본의 상인이 왜구로 가장하여 밀무역에 뛰어들었다. 상인은 물론, 신사층을 비롯한 지방의 유력자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왜구와 밀무역에 나섰다. 이후 명은 군사력으로 왜구를 적극적으로 토벌하였으나, 밀무역을 근절할 수는 없었다. 결국, 16세기 후반 명은 상인들의 잇따른 요청을 받아들여 동남아시아 방면의 도항과 무역을 허용하였다. 이에 많은 중국인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여 베트남의 호이안, 필리핀의 마닐라 등지에 화교 사회를 형성하였다.
조선의 무역
조선은 명과 조공 관계를 맺고 정기적으로 사절을 파견하였다. 사절은 명에 인삼·종이·붓·화문석 등을 공물로 바치고, 생사·비단·약재·서적 등을 답례품으로 가지고 왔다. 사절단을 수행한 역관은 적극적으로 밀무역에 참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명에 바치던 공물과 같은 종류의 물품을 판매하고 중국에서 비단을 비롯한 사치성 소비재를 수입하였다.
한편 조선은 세종 때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섬을 토벌하였다. 그 후 남해안의 포구 세 곳에 왜관을 설치하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일본인의 무역을 허락하였다. 조선은 식량·옷감·서적 등을 수출하고, 구리·유황·물감·향료·약재 등을 수입하였다. 그러나 제한된 무역에 반발한 일본인이 삼포 왜란(1510)을 일으킨 후 무역은 점차 쇠퇴하였다가, 에도 막부 수립 후 재개되었고, 류큐와 시암(타이), 자와 등의 상인도 조선을 찾아와 교역하였다.
일본과의 교류와 무역에는 쓰시마번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17세기 이후 에도 막부는 조선과의 외교 교섭을 쓰시마번에 위임하였으므로, 통신사가 일본에 갈 때는 쓰시마번의 관리가 동행하였다. 한편, 400~500여 명에 이르는 쓰시마인들이 부산의 왜관에 거주하며 무역에 종사하였다.
일본의 무역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도 명과 조공(감합) 무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공 무역만으로 일본은 명의 동전·도자기·비단 등을 충분히 얻기 어려웠고, 명도 일본의 구리·유황·은을 얻기 어려웠다. 16세기 중반 센고쿠 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자 무로마치 막부가 주도하던 감합 무역이 중단되고 밀무역이 더욱 성행하였다.
이 무렵 일본 상인은 해외로 활발하게 진출하여 동남아시아에 무역 거점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에도 막부는 이들에게 슈인장을 발급하여 교역을 통제하였다. 그후 슈인장 무역을 통해 일부 다이묘 세력이 성장하고 크리스트교가 확산되자, 에도 막부는 이를 막고자 해금을 실시하고 크리스트교를 탄압하였다. 그러나 해금으로 서양인의 내왕을 제한하고 사무역을 통제하는 중에도, 네덜란드 상인에게는 나가사키를 개방하여 무역을 허용하였다.
에도 막부는 청과 조공 관계를 맺지 않았으나, 청 상인이 나가사키에 와서 교역하는 것은 허용하였다. 조선의 중계를 통해 청과의 간접적인 교역도 이루어졌다.
중계 무역 기지 류큐
명의 해금 정책으로 중국 상인의 활동이 위축되자 류큐의 중계 무역이 활발해졌다. 류큐는 지금의 오키나와에 있던 나라로, 지리적으로 동아시아나 동남아시아 각국과의 중계 무역에 적합하였다. 14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에 걸쳐 명과의 조공 무역을 중심으로 일본,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잇는 중계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명은 조공 횟수를 국가마다 지정하였는데, 베트남은 3년에 한 번, 일본은 10년에 한 번 정도였다. 이에 비해 류큐는 1년에 한 번으로 우대받았다. 류큐는 조공을 통해 중국 상품을 얻을 수 있었고, 명의 해금 정책으로 중국 상업 세력이 비웠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다.
류큐는 명에 부채·종이·해산물 등을 수출하고, 생사와 도자기를 수입하여 이를 주로 일본과 동남아시아에 판매하였다. 또한 류큐산 조개껍데기·유황, 일본의 칼·구리, 동남아시아의 상아·후추·침향 등을 명과 조선에 판매하였다. 류큐는 조선에서 저포·마포·면포 등을 수입하고, 불경·유교 경전·범 종 등도 조선에서 가져갔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에 해금이 완화되어 사무역이 발달하자, 류큐의 중계 무역은 점차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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