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7세기 동아시아 전쟁의 전개
임진왜란의 발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센고쿠 시대를 통일하였지만, 각지에 있는 강력한 다이묘의 군사력은 그의 정권에 위협이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이묘의 군사력을 약화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영토 확장과 무역 확대를 위해 명 침략에 협조할 것을 조선에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를 빌미로 16만여 명의 병력으로 임진왜란(임진 전쟁)을 일으켰다(1592).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은 부산진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후 20여 일 만에 한성을 함락하고 평양과 함경도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남해안에서 일본 수군에 연전연승하면서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도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명의 참전
임진왜란 발발 소식을 접한 명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을 침공하는 안내자 역할을 할지 모른다고 의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일본에 맞선 조선의 저항이 분명하고 일본의 명 침공 가능성이 확인되자, 명은 요동을 방어하고 수도인 베이징을 지키기 위해 참전을 결정하였다. 이로써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삼국 간의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명은 국내외 정세 불안 때문에 적극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기는 어려웠다. 광산 개발과 상업세 징수를 위해 파견된 환관의 수탈로 전국에서 저항이 잇따라 일어났고, 세력을 키운 여진족의 침공도 우려되었다. 이에 명은 조선에 지원군을 보냈지만, 동시에 외교적 교섭을 함께 추진하였다.
정유재란과 왜란의 영향
명의 지원군과 함께 반격에 나선 조선군은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러나 명군이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하여 한성(한양) 탈환에 실패하자,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후 일본군은 경상도 해안 지방까지 밀려났고, 철수를 위해 명과 교섭에 나섰다.
명과 일본은 조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화를 추진하였다.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항복한다는 문서를 만들어 명에 보냈다. 1596년 명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왕에 책봉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명 공주를 천황 후궁으로 출가, 조선 남부 4도 할양, 명과의 무역 재개’ 등의 요구 조건을 내세웠고, 이 요구가 받아 들여지지 않자 명과의 강화를 거부하고 정유재란(정유 전쟁)을 일으켰다(1597). 그러나 일본군은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이끈 조선 수군에게, 육지에서는 조·명 연합군에게 대패하여 궁지에 몰렸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군은 철수하였고 전쟁은 끝이 났다.
7년 동안 전쟁터가 된 조선은 인구가 크게 줄고 재정이 궁핍해졌다. 또한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는 등 큰 피해를 보았다. 명은 재정 악화에 따른 무리한 세금 징수로 농민 봉기가 잇따르며 점차 쇠퇴하였다. 반면에 만주의 누르하치는 명의 지배에서 벗어나 점차 세력을 키워 후금을 세우고 여진족을 통일하였다(1616).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추종 세력을 물리치고 에도 막부를 세웠다(1603).
정묘・병자호란의 전개
임진왜란 전후 누르하치는 모피와 인삼 등의 특산물을 명과 교역하면서 경제력을 축적하였다. 그리고 팔기제를 시행하여 사회·군사 조직을 정비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만주 사회가 정비되자 누르하치는 후금을 세우고 명과 대결하였다.
명은 후금을 공략하기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구하였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적 태도를 보이던 광해군은 명의 압력과 대신들의 독촉으로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조선군을 파병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이 사르후 전투에서 후금에 투항한 이후 광해군은 명의 추가 파병 요구를 거절하였다. 후금에는 파병의 불가피함을 내세워 관계가 악화하는 것을 방지하였다. 이에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에 불만을 품고 인조반정을 일으켰다(1623).
명은 인조반정을 묵인하는 대가로 조선에 주둔하던 명의 장수 모문룡과 연합하여 후금을 공격할 것을 요구하였다. 인조는 반정의 정당성 을 인정받기 위해 명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후 모문룡이 후금 정벌과 요동 수복을 천명하자 후금은 1627년 조선을 침공하였다(정묘호란, 정묘 전쟁). 하지만 후금은 후방에 있는 명을 염려하여 조선과 형제 관계를 맺고 세폐를 받는 조건으로 2개월 만에 철수하였다.
1636년 후금의 홍타이지는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으로 고쳤다. 그리고 이 사실을 조선에 통보하고 신하의 예를 갖추도록 요구하였다. 명 공략을 앞두고 먼저 조선을 굴복시켜 배후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요구를 놓고 조선에서는 외교적으로 해결하자는 주화론과 이에 반대하는 척화론이 대립하였다. 척화론이 힘을 얻어 청의 요구를 거부하자 홍타이지는 직접 조선을 침공하였다(병자호란, 병자 전쟁).
청군은 5일만에 한성을 함락하였고, 인조는 청군의 침입에 맞서 남한산성에서 저항하였으나 왕비와 왕족이 피란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각지에서 올라오던 구원군마저 잇달아 패배하자, 결국 삼전도에서 항복하여 청과 군신 관계를 맺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끊고 청과 조공·책봉 관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오랑캐에게 당한 치욕을 씻어야 한다며 효종 대에 북벌을 준비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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