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의 문물 교류
명 말, 청 초 이후 선교사의 활동
16세기 말 이후 서양 선교사들은 크리스트교를 포교하기 위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로 건너왔다. 명 대 최초의 선교사는 1582년 마카오에 도착한 예수회 출신의 마테오 리치였다. 그는 세계 지도인 「곤여만국전도」를 제작하였으며, 지구의·해시계·프리즘·자명종 등 서양의 과학 기구를 명에 소개하였다. 또한 포교를 위해 중국의 예절을 배우고 중국식 복장을 하였으며, 유클리드의 『기하원본』을 명의 고관이자 크리스트교도가 된 서광계와 함께 중국어로 번역하였고, 『천주실의』를 한문으로 저술하였다.
• 중국 지식인: 천주가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고 그것을 변화·발전시킨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 서양 선교사: 집은 스스로 세워질 수 없고 언제나 목수들이 완성합니다. 천지는 스스로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천주가 반드시 계심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 마테오 리치, 『천주실의』 -
선교사들은 천문과 역법을 포함한 과학 지식이나 화포 제작 등의 군사 기술, 그리고 음악과 미술 등의 예술 방면에도 조예가 깊었다. 명 말에 중국으로 건너온 아담 샬은 서양 역법을 소개하고 조총의 제작법을 전해 주었다. 그는 청 대에 천문과 역법을 관장하는 흠천감의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명 대의 대통력을 서양 역법에 기초하여 시헌력으로 개정하였다. 청 대에 페르비스트는 세계 지도인 「곤여전도」를 제작하고, 부베는 「황여전람도」라는 전국 지도를 제작하는 데 참여하였고, 카스틸리 오네는 건륭제 시절에 원명원의 서양식 건물을 설계하고 많은 서양화를 남겼다. 강희제 통치 시기에 조상 제사나 공자 숭배 등을 둘러싼 전례 문제로 크리스트교의 포교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지만, 선교사들은 천문과 역법·의학·예술 방면에서 궁정에 봉사하는 조건으로 계속 중국에서 활동하였다.
조선의 서양 문물 수용
조선은 1627년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박연)가 제주도에 표착한 것을 계기로 서양인과 처음 접촉하였다. 벨테브레이는 훈련도감에서 서양식 총포 제작에 참여하였다. 1653년에는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 선원이었던 하멜과 그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하였다. 하멜은 1666년에 일본으로 탈출하여 두 해 뒤 본국에 도착하였고, 『하멜 표류기』로 알려진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서양 문물의 접촉과 도입은 주로 베이징을 다녀온 사절단을 통해 이루어졌다. 정두원은 사절단의 일원으로 명에 갔다가 예수회 선교사에게서 서양 과학책과 자명종, 천리경 등을 받아와 소개하였다. 또한 새로운 화약 제조법도 전하였다. 홍대용은 연행 사절단을 따라 베이징으로 가서 흠천감을 방문하였다. 그는 천문 관측기구를 관람하고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서양의 천문 관측 기법을 배웠다. 또 지구 자전설과 지구 구형설을 담은 『의산문답』도 저술하였다. 연행 사절단이 전해 준 서양 문물은 조선의 지식인에게 학문적 자극을 주었다. 18세기 북학파 실학 자들은 서양 문물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였다.
한편 청에서 귀국한 소현 세자는 아담 샬로부터 지구의와 크리스트교 교리서를 받아 왔다. 아담 샬의 시헌력은 조선에도 들어와 19세기 말 태양력을 도입하기 전까지 시행되었다. 또한 세계 지도인 「곤여만국전도」와 지리서인 『직방외기』가 유입되면서 지리 관념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및 오늘날의 오세아니아까지 확장되었다. 이리하여 조선 지식인이 지닌 전통적인 중국 중심의 세계관이 변화하였다. 하지만 성리학적 세계관에 젖어 있던 대부분의 지식인은 서양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일본의 서양 접촉
일본에 가장 먼저 선교사로 온 사람은 에스파냐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프랜시스코 하비에르였다. 그는 16세기 중엽 일본 규슈 지역에 크리스트교를 포교하였다. 크리스트교는 빠르게 확산하여 지방의 다이묘와 가신들 가운데 크리스트교를 수용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포르투갈은 일본과 1571년부터 무역을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인은 중국산 비단이나 생사를 일본 은과 교역하면서 마카오와 나가사키를 왕래하는 중계 무역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서양 세력의 일본 진출을 염려한 에도 막부는 크리스트교 금교령을 내리고 많은 신자를 처형하였다. 또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선박이 일본으로 오는 것을 통제하고, 네덜란드 선박만 대외 무역 창구인 나가사키의 데지마에 올 수 있게 하였다. 그 결과 일본에서는 서양의 과학과 문물을 연구하는 난학(란가쿠)이 발달하였다.
서양에 전해진 동아시아 문물
서양 문물이 동아시아로 전해짐과 동시에 동아시아 문물도 유럽으로 전 해졌다. 선교사들은 중국의 정치와 문화, 사회 사정 등을 유럽에 소개하였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견문록』을 써서 중국의 사정을 상세하게 유럽에 전하였다. 『논어』와 같은 중국 고전은 볼테르 등의 계몽사상가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명과 청의 비단·도자기·차 등은 서양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차 마시는 풍습이 크게 유행하였다. 17세기 중반 이후 일본의 아리타 자기가 서양으로 수출되었고, 에도 시대의 미술은 서양의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전례 문제로 선교사들이 추방되면서 문화 교류가 상당 기간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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