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의 발달과 도시의 성장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
명·청 대에는 민영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다. 강남 각 지역의 도시와 농촌에서 견직물, 면직물, 제철, 도자기 등의 수공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강남의 쑤저우, 항저우, 난징, 징더전 등지에서 도시 수공업이 발달하였는데 쑤저우의 견직물과 징더전의 도자기는 매우 유명하였다.
민영 수공업의 발전과 함께 은의 대량 유입, 운하와 각지로 연결된 도로 등을 통해 상업도 번성하였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위해 각 지역에서 조달되는 물품 교역으로 상품 유통망은 더욱 확산되었다.
조선에서도 농촌 경제의 성장, 수공업의 발전을 통해 상업이 발달하였다. 연해 지역과 육상의 교통망이 정비되면서 교통의 요지와 포구에 물자가 집결되었고, 전국적으로 장시가 성장하면서 상품 유통이 활발해졌다.
공물을 토산물 대신 쌀이나 포, 동전으로 납부하는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관청에 물품을 조달하는 공인이 성장하고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이 촉진되었다. 정부는 일부 독점 상인의 특권을 폐지하여 자유로운 상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상업의 발전에 따라 상평통보가 발행되어 유통되었다.
일본에서도 금, 은 채굴과 제련 기술의 발달로 광업과 수공업이 성장하고 고급 견직물을 비롯해 도자기, 술 등 각지의 특산품이 생산되어 판매되었다. 에도 막부가 연안 항로의 정비에 힘쓰면서 해상 교통로가 정비되고 육상 교통과 연결되는 교통 체계가 확립되어 쌀 시장과 같은 전국 단위의 거대한 시장이 형성되었다.
대상인의 출현과 활동
상업이 발전함에 따라 자본을 축적한 대상인이 등장하였다. 명·청 대에는 전국적 유통망을 갖추고 활동한 산시 상인과 휘저우 상인이 유명하였다. 이들은 전국적인 상권을 장악하고 창장강 중하류 등지에서 소금을 독점적으로 판매하였으며, 면화·쌀·목재·차·생사·견 직물·면제품 등을 유통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또한 각 지역에 회관을 건립하여 이를 거점으로 삼아 구성원의 이익을 도모하고, 관료와 돈독한 관계를 맺어 상업 활동의 입지를 넓히려 하였다.
조선에서 최대의 소비층인 양반이 대부분 농촌에 거주하였기에 자급자족 체제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장시가 출현하였고, 17세기 이후에는 포구 시장과 도시 시장이 등장하였다. 18세기가 되면 장시는 전국에 1,000여 곳으로 늘어났으며, 상품 거래와 정보 교환 등을 통해 상업 발전을 주도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상인으로 한양의 경강 상인, 개성의 송상, 동래의 내상, 의주의 만상 등과 같은 대상인 집단이 등장하였다. 특히 송상은 주요 지역에 송방을 설치하여 전국적 유통망을 가지고 상업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어음과 같은 신용 화폐를 이용하였으며, 청·일본과의 무역에도 개입하였다. 의주의 만상이나 동래의 내상도 청이나 일본 상인과의 교역을 주도하였다.
경강 상인은 서남해 연안과 한강을 오가며 쌀·소금·목재·어물 등을 판매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이들은 막강한 자본력과 권력의 비호 아래 상품을 매점하고 한양에서 출하 시기를 조절하면서 이득을 얻었다.
일본에서는 17세기 후반 상공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번성하면서 조닌이 성장하였다. 조닌은 당시의 사회적·경제적 변화를 주도하였다. 조닌의 부가 축적되어 사치 풍조가 심해지자 막부가 사치 금지령을 내릴 정도였다.
도시의 성장
인구 증가, 상공업의 발전에 따라 도시가 성장하였다. 농촌에서 토지를 잃은 농민들과 재해로 기근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도시로 모여들었고, 상공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도 도시로 이주하였다.
명 중기 이후 수로 교통이 편리했던 창장강 유역의 강남에서는 시진이 급격히 늘어났다. 종소 상공업 도시인 시진은 거미줄처럼 연결된 수로를 통해 유통망을 형성하였다.
청의 수도인 베이징은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이자 최대 소비도시였고, 인구는 19세기에 100만 명까지 늘어났다. 베이징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매년 400만 석 이상의 쌀이 강남에서 화북으로 창장강과 대운하를 통해 운송되었다.
조선에서도 17세기 이후에는 대동법의 시행과 화폐 경제의 확산, 인구 증가로 도시화가 촉진되었다. 18세기 들어 장시가 성장하여 상업의 발달에 따라 강경, 원산, 대구 등지가 상업의 요충지로 성장하였다. 한양은 대표적인 소비 도시로 18세기 후반 인구가 약 30만 명이 넘었다. 이들은 수상 교통의 중심지인 성 밖의 마포 등 한강 변에 집중적으로 거주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상대적으로 중국이나 일본보다 도시의 성장이 더딘 편이었다.
일본 역시 에도 시대에 들어와 도시가 눈에 띄게 발전하였다. 조카마치는 군사적 방어 목적으로 무사들을 거주하게 한 도시로 조성되었으나 점차 제조, 무역, 상업 도시로 발전하였다. 바다와 육지가 접하는 위치에서 물산이 집결되는 오사카, 직물·염색·공예 등의 전통 산업이 발달했던 교토, 그리고 인구 100만 명이 넘는 거대한 소비 도시인 에도는 ‘3도’라 불리며 번성하였다. 나고야, 나가사키, 히로시마 등에도 수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였다. 도시에는 다이묘와 가신 집단의 생활을 지탱하기 위해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모여들었다.
특히 산킨코타이 제도에 따라 다이묘와 가족, 하급 무사, 도시 노동자에게 필요한 물품이 에도로 운송되었다. 도시의 성장과 상인의 활동으로 소비를 위한 부의 축적이 중요하게 인식되면서 신분 질서의 동요 현상이 점차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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