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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새로운 학문의 대두

새로운 학문의 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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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학문의 대두

 

고증학, 공양학의 대두

     명 말에 서양 학문이 들어오고 상공업이 발달하여 농학, 지리학, 역법 등의 실용적 학문에 관한 관심이 커졌다. 특히 고염무, 황종희, 왕부지 등이 경세치용의 입장에서 유교 경전과 지리서·역사서 등의 고전을 연구함으로써 정치 개혁 성격을 띤 학문이 발전하였다. 서광계는 『농정전서』를 저술하여 농학을 집대성하였으며, 마테오 리치와 함께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본』을 번역하였다. 송응성은 『천공개물』을 지어 이 시기의 과학 기술에 대한 지식을 사전적으로 정리하였고, 이시진은 『본초강목』을 지어 약학 지식을 크게 높였다. 이러한 실사구시적 학문은 청이 안정기에 들어간 후 억압을 받기도 하였지만, 고증학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

     18세기 들어 유교 경전과 금석문 등을 실증적인 방법으로 연구하는 고증학이 발전하였는데, 고증학의 실사구시적 학문 태도를 기반으로 『강희자전』, 『고금도서집성』, 『사고전서』 등 대규모 편찬 사업이 벌어졌다. 고염무는 이러한 흐름을 여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청 정부가 추진한 대규모 서적 편찬 사업은 고증학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학자들의 관심을 현실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한편 청 말에는 『춘추공양전』을 연구하여 정치를 비판하는 학자들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로써 현실 개혁적인 공양학이 성립되었다. 공양학자 위원이 저술한 『해국도지』는 조선의 지식인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서양 세력의 침입과 농민 봉기로 사회가 어려워지자 공양학은 정치 개혁의 사상적 근거를 제시하여, 캉유웨이 등이 주도한 변법자강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조선 실학의 대두와 서학의 전래

     17~18세기 조선의 일부 학자는 사회·경제의 변화 속에 조선 사회의 문제점을 바로 보고 그 해결을 위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이들은 성리학의 교조화를 비판하면서 중국과 서양의 새로운 학문적 성과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관료제의 효율적 운용, 인재의 차별 없는 등용, 노비제 혁파, 서얼 차별 해소 등을 주장하고 토지 제도와 수취 제도의 개혁, 상공업 진흥과 기술 개혁 등을 제기하였다.

     이익, 정약용 등은 농촌 사회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토지 개혁을 통해 농민 생활의 안정을 주장하였다. 박지원과 박제가 등은 상공업 진흥과 청의 문물 수용을 주장하였다. 특히 박제가는 소비를 통해 생산을 진흥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재물은 우물과도 같아 퍼서 쓸수록 가득 채워지는 것이고, 버려두면 말라버린다. 비단을 입지 않아서 나라 안에 비단 짜는 사람이 없어지면 길쌈질이 쇠퇴하고, 그릇이 비뚤어지든 어떻든 개의치 않으면 나라에 공장과 도야(질그릇 굽는 곳과 대장간)가 없어지고, 기예도 없어지는 것이다.
- 박제가, 『북학의』 -

 

정약용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또한 일부 학자는 역사, 지리, 언어 분야의 연구에도 힘써 이후 근대 학문과 교육에도 영향을 주었다. 국학이 발달하여 한반도의 역사, 지리, 국어 등을 다루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에 『발해고』, 『택리지』 등이 편찬되었고,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였다. 

     한편 중국에 갔던 사신들을 통해 서양 학문과 함께 크리스트교가 전해졌다. 처음에 크리스트교는 학문적 관심으로 수용되어 서학으로 불리며 서양 과학 기술의 가치를 인식한 실학 운동의 하나로 받아들였으나 점차 신앙으로서 널리 퍼졌다. 크리스트교의 평등사상과 제사 의식 거부는 하층민들에게 평등사상을 전파하자, 성리학적 사회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조선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고학과 국학, 난학의 발전

     에도 막부는 성리학을 관학으로 우대하였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에도 사회가 성숙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성립된 고학은 이기론과 같은 형이상학적 관념론보다 실용적 학문을 중시하고, 성리학을 극복하기 위한 논리로 공자·맹자 시대 유학으로의 복귀를 주장하였다. 이토 진사이는 주자가 성인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하였고, 오규 소라이는 중국 고대 성인의 도를 명확히 하는 것을 학문의 궁극적 목표로 삼고 고대 유교 경전인 육경을 강조하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의 언어, 문학, 민속, 신화 등의 고대 문화가 강조되면서 국학이 발전하였다. 국학자들은 유교, 불교 등의 외래 사상에서 탈피하여 일본 고대의 참모습을 추구하였다. 특히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고사기』 연구에 집중하여 일본 고대의 마음·언어·제도 등을 고도(古道)라 칭하며, 고도의 창시자는 중국 고대의 성인과 다른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비롯한 일본 고대의 신들이라 하며 일본 절대 우월주의로 나아갔다. 그의 사상은 이후 존왕 운동과 결부되어 국가 신토의 수립에도 영향을 주었다.

     에도 시대에는 나가사키를 통해 들어온 서양의 학문을 바탕으로 난학이 발전하였다. 난학은 어학·의학·지리학·역학 등에 관한 관심에서 시작하 였는데, 특히 『해체신서』의 번역은 난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난학은 일본의 지식인이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탈피하고 학문 연구에서 경험주의, 실증적 방법론을 수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