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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근대화 운동의 전개

근대화 운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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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 운동의 전개

 

청에서 전개된 근대화 운동

     제1차 아편 전쟁 이후 청에서는 외세의 경제 침탈, 막대한 전쟁 비용과 배상금 지급 등으로 재정이 악화되었고 이에 조세 부담이 많이 늘어난 농민의 불만이 높아졌다. 이 무렵 홍수전은 청 왕조 타도와 평등 사회 건설, 토지 균분 등을 주장하며 태평천국 운동을 일으켰다. 태평천국 운동은 10여 년 만에 진압되었으나, 청 정부의 통치 능력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청은 증국번과 이홍장 등의 한인 관료를 중용하여 양무운동을 전개하였다. 양무운동은 ‘중체서용’을 내세워 중국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양의 군사력과 과학 기술을 수용하여 자강을 이루려는 근대화 운동이었다. 양무운동은 근대적 군수 공장 설립, 서양식 해군 창설, 근대적 기업 설립 등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양무운동은 '중국의 전통을 근본으로 삼고 서양의 기술만 받아들이자.'라는 중체서용의 관념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제도 개혁 등이 뒷받침되지 못해 중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하였다.

     청·일 전쟁의 패배로 양무운동의 한계가 드러나자 캉유웨이와 량치차오 등은 청의 낡은 제도가 패배의 원인이라고 판단하고 황제의 지지를 바탕으로 변법자강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아 모든 분야에서 근대 개혁을 추진하여 과거제 폐지와 신교육 실시, 상공업 진흥, 입헌 군주제 도입 등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개혁은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파의 반발에 부딪혀 100여 일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

     개항을 전후하여 막부의 개항 방침에 반발하는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막부가 천황의 허락 없이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한 것을 문제 삼아 천황을 받들고 서양 세력을 내쫓자고 주장하는 ‘존왕양이’를 내세우며 막부에 저항하였다. 하지만 막부의 탄압을 받고 서양과의 군사적 충돌에서 패하면서 서양 세력을 쫓아내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하고 서양 문물 수용과 막부 타도로 방침을 바꾸었다. 결국 이들 반막부 세력은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을 중심으로 신정부를 수립하여 변혁을 추진하였다(메이지 유신, 1868).

     메이지 정부는 서양의 근대 국가를 모델로 삼아 대대적인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수도를 도쿄로 옮기고 폐번치현을 단행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였다. 징병제를 시행하여 근대적 군사 제도를 마련하고, 토지 가격을 기준으로 세금을 징수하는 근대적인 토지세 제도를 확립하여 재정을 안정시켰다. 또한 철도를 부설하고 근대적 공장을 세워 상공업을 진흥하는 식산흥업 정책을 추진하였다. 신분제를 개혁하여 사민평등의 실현을 표방하였으며, 소학교를 의무 교육으로 하고 대학을 설립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미국과 유럽에 파견하였다.

     이러한 개혁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봉건적 특권을 빼앗긴 무사층과 경제적 부담이 늘어난 농민의 불만이 높아졌다. 이에 메이지 정부의 일부 인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 침략(정한론), 타이완 침략, 류큐 병합과 같은 대외 침략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내정 개혁을 중시하는 반대 세력에 의해 무마되었다. 하지만 1870년대 중반 메이지 정부는 타이완을 침공하고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는 등 대외 팽창에 나섰다.

 

 

 

 

조선의 개화 정책 추진

     개항 이후 조선 정부는 일본에 수신사와 조사 시찰단을, 청에 영선사를 파견하여 근대 시설을 돌아보고 근대 문물 수용에 나섰다. 또 근대적 행정 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여 개혁을 추진하고 별기군을 창설하여 신식 군대를 양성하였다. 하지만 개화에 반대하는 움직임도 있었는데, 보수적 유생들의 위정척사 운동과 구식 군인과 도시 빈민이 일으킨 임오군란 등이 대표적이었다.

     조선 정부는 청의 양무운동을 본받아 서양의 과학 기술을 수용하는 방법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려 하였다. 임오군란 이후 청이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고문을 파견하는 등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면서 근대화의 속도와 방향을 둘러싸고 개화 세력 내부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온건 개화파는 청을 모방하여 유교적 질서는 유지하되 서양의 기술을 배우고 정부 기구와 제도를 정비하려 하였다. 반면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 개화파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떠 서양의 과학 기술은 물론 근대 사상과 제도 등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하였다.

     급진 개화파는 청의 간섭 아래에서는 자주독립 국가를 이루기 힘들다고 생각해, 일본의 지원을 받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1884). 그리고 개혁 정강 14개 조를 발표하여 청에 대한 사대 관계 폐지, 신분제 폐지, 조세 제도 개혁 등의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1. 대원군을 가까운 시일 안에 돌아오게 하고 청에 조공하는 허례를 폐지할 것.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제정하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등용할 것.
3. 지조법을 개혁하여 아전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구제하며 재정을 넉넉하게 할 것.
12. 재정은 모두 호조에서 관할케 하고 그 밖의 재무 관청은 폐지할 것.
13. 대신과 참찬은 합문 안의 의정소에서 의논해 아뢰어 결정하고 정령을 공포해 시행할 것.
- 김옥균, 『갑신일록』 -

 

     하지만 갑신정변은 청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급진 개화파는 몰락하고 조선의 근대화 정책이 위축되었다. 청은 임오군란에 이어 갑신정변까지 무력으로 진압하자 내정 간섭을 더욱 강화하였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청과 일본은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였다. 이후 일본은 군사력을 동원하여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였고 새 내각을 구성하게 하고 개혁을 강요하였다. 새 내각은 왕실과 정부의 분리, 신분제 폐지, 각종 폐습 타파, 태양력과 단발령 시행 등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분야에서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갑오·을미개혁).

     하지만 개혁이 추진되는 도중, 개혁의 급진성에 대한 불만이 커졌고 일본이 내정 간섭에 반발하는 명성 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이에 많은 유생이 의병을 일으켜 저항하였고 고종이 혼란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 파천을 단행하면서 개혁은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