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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근대 국민 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

근대 국민 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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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국민 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

 

청의 신정 실시와 신해혁명

     열강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청 정부는 ‘신정(新政)’을 실시하여 중단되었던 개혁을 다시 추진하였다. 신정은 정치, 경제, 군사, 사회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서구화·근대화를 도모하는 일련의 개혁이었다. 청 정부는 많은 유학생과 관리를 일본에 파견하여 근대화의 경험을 배우게 하였고, 신식 군대 창설과 과거제 폐지 등을 단행하였다.

     한편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청의 지식인들은 입헌파와 혁명파로 나뉘었다. 량치차오 등의 입헌파는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에 자극을 받아 입헌 군주제의 시행을 주장한 반면, 쑨원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파는 청 왕조를 타도하고, 한족이 중심이 되는 민주 공화제의 국가 수립을 주장하며 무장봉기를 추진하였다. 이 무렵 청 정부는 일본과 서양 각국을 시찰하고 입헌 준비에 나서 「흠정헌법대강」을 반포하고(1908) 의회 설립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내각이 황족을 중심으로 구성되자 입헌파는 청 정부의 입헌 의지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청 정부의 개혁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상황에서 1911년 후베이성 우창에서 혁명파의 이념에 영향을 받은 신군이 봉기하였다(신해혁명). 이에 호응한 각 성이 봉기하여 청의 지배를 거부하고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을 수립하였다(1912). 하지만 쑨원을 비롯한 혁명파는 군사 및 재정 면에서 열세였기 때문에, 공화제 시행을 조건으로 군사적 실권을 가지고 있던 위안스카이에게 임시 대총통 자리를 넘겨주었다. 그러나 총통에 오른 위안스카이가 제정을 부활하려다 실패하고, 이후 중국은 군벌들에 의해 분열되었다. 

 

 

 

 

독립 협회의 활동과 대한 제국 수립

     열강의 이권 침탈이 가속화하는 상황에서 서재필과 같은 조선의 일부 지식인은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정부 관료들과 함께 독립 협회를 창립하였다(1896). 독립 협회는 문명 개화와 자주독립사상을 선전하는 민중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만민 공동회라는 대규모 집회를 열어 정부에 재정 개혁과 인민의 기본권 보호, 의회 설립 등을 요구하였다. 특히 개혁적 관리와 학생, 시민이 함께 참석한 관민 공동회에서 「헌의 6조」가 결의되어 고종의 재가를 받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헌의 6조
1.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관민이 합심하여 전제 황권을 공고히 할 것.
2.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계약과 조약은 해당 부처의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함께 날인하여 시 행할 것.
3.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담하여 맡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4. 중대한 범죄는 공판하고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
5. 칙임관은 정부에 그 뜻을 물어 과반수가 동의하면 임명할 것.
6. 정해진 규정을 실천할 것.
- 『주본존안 제3책』 -

 

하지만 수세에 몰린 수구 세력은 고종을 움직여 보수 내각을 조직하고, 독립 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추진한다고 모함하여 독립 협회를 강제 해산시켰다(1899).

     1897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실추된 국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 제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독립 협회 해산 후 고종은 황제 중심의 근대 국가 수립을 위해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여 대한 제국의 정치 체제가 전제 군주제임을 확고히 하였다(1899).

     대한 제국은 일련의 개혁(광무개혁)을 통해 근대 국가를 건설하려고 노력하였다. 식산흥업 정책을 추진하여 상공업을 진흥하고 서양의 기술과 기계를 도입하여 근대적 시설을 마련하였다. 민간 자본에 의한 공장과 회사 설립도 장려하였다. 또 인재 양성을 위해 근대 학교 설립에 힘썼으며,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자유 민권 운동과 「대일본 제국 헌법」 제정

     메이지 정부가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내부 반발이 나타났다. 정부의 개혁으로 부담이 늘어난 농민은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켰으며, 봉건적 특권을 빼앗긴 옛 무사 계층인 사족층의 반란도 잇따랐다. 또한 정부의 전제 정치를 비판하고 서양식 입헌 제도의 도입을 요구하는 자유 민권 운동이 일어났다.

     1870년대부터 시작된 자유 민권 운동은 서양식 의회 설치와 헌법 제정을 요구하였다. 자유 민권 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었으며, 정당을 결성하거나 헌법 초안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에 메이지 정부는 요구 사항을 받아들여 점진적으로 서양식 입헌 체제를 수용하겠다고 밝히고 헌법 제정과 의회 설치 등을 추진하였지만 동시에 자유 민권 운동을 탄압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서양식 정치 제도의 필요성은 인정하여 1889년에 「대일본 제국 헌법(메이지 헌법)」을 제정하고 이듬해에 중의원 선거를 시행하여 제국 의회를 설립하는 등 입헌 제도의 틀을 완성하였다. 「대일본 제국 헌법」의 제정으로 일본은 입헌 군주제에 바탕을 둔 근대 국가의 제도적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대일본 제국 헌법」은 천황을 신성 불가침한 존재로 규정하고 군 통수권과 입법권 등 막강한 권한을 천황에게 부여하였다. 1890년에는 충효를 강조하는 ‘교육 칙어’를 공포하여 천황제를 뒷받침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