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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농업의 발달과 인구 증가

농업의 발달과 인구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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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의 발달과 인구 증가

 

농업 생산력의 발전

     17세기 이후 동아시아 각 지역에서 곡물의 품종 개량, 수리 시설 정비, 시비법, 모내기법을 비롯한 농업 기술이 발달하였다. 또한 집약 농법의 확대와 개간에 따른 경지 면적의 증가로 곡물 생산량이 늘어났다.

     명 대에는 ‘창장강 유역의 후광 지역에 풍년이 들면 천하가 풍족하다.’라는 말처럼 후난과 후베이성 지역이, 청 대에는 쓰촨성 지역이 곡창 지대가 되었다. 이 지역에서 생산된 쌀은 창장강과 운하를 통해 전국으로 유통되었다. 강남 지역에서는 직물업을 위한 뽕나무나 면화를 재배하여 수입을 올리는 농가도 늘어났다.

     조선에서도 모내기법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쌀·면화·채소·담배·인삼 등의 재배가 확대되었다. 일본에서는 다이묘들이 개간을 장려하면서 경지 면적이 늘어났으며, 다양한 농기구가 개발되었다.

     한편 신항로를 개척한 유럽인과의 교역을 통해 아시아에도 아메리카가 원산지인 새로운 작물들이 들어왔다. 옥수수, 감자, 고구마 등의 신작물은 구황 작물의 역할을 하며 식량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을 주었다. 고추나 담배 등도 상품 작물로 재배되어 농가 소득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였다.

 

 

 

 

명・청 대의 인구 증가

     17세기 이후 동아시아 지역에는 농업 생산력이 발전하고 새로운 구황 작물이 도입되어 인구가 증가하였다. 중국에서는 종두가 발명되었으며, 그 기술이 전국으로 퍼져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을 키웠다. 또한 명의 『본초강목』이나 조선의 의료 기술이 향상되어 사망률이 낮아졌다. 게다가 오랜 평화와 18세기의 온난한 기후 등의 영향으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북송 시대에 1억 명을 돌파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의 인구는 18세기 후반 3억 명을 돌파하였으며, 19세기 중반에는 4억 3000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인구가 증가에 따른 부작용도 컸다. 생활 수준이 떨어지고 환경이 파괴되었으며, 물가가 크게 올랐다. 경작지가 부족해지자 생활 여건이 악화하여 수많은 실업자와 유민이 전국에 걸쳐 발생하고, 비밀 결사와 농민의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등 사회 불안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산간이나 변경 지대로 이동하는 인구가 늘어나 현지인과 이주민 사이의 갈등도 심해졌다. 청 대 중기 이후의 반란은 대부분 이런 지역에서 일어났다. 인구 밀도가 지나치게 높아진 동남 해안 지역에서는 계투가 만연하였고, 국외로 이주하는 사람도 크게 늘었다. 

     조선에서도 두 차례의 전쟁을 겪고 난 후 18세기 들어 사회가 안정되면서 인구가 늘어났다. 일본도 에도 시대에 들어 꾸준히 인구가 늘어났으나, 18세기 들어 자연재해에 따른 대기근 등으로 인구가 정체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의 인구 변화

     계속되는 전쟁으로 농촌 사회가 심각하게 파괴되자, 조선 정부는 전세를 낮추고 진전의 개간과 양전 사업을 지속해서 추진하였다. 그 결과, 숙종 때에는 경지 면적이 전쟁 전의 상태로 거의 회복되었다.

     경지 면적이 늘고 모내기법과 시비법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등 농업 기술이 발전하면서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었다. 또 장시의 발달로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지자, 면화, 담배, 채소 등 상품 작물 재배도 늘어났다.

     조선의 인구는 건국 초기에 500만 명 정도였으며, 16세기 중반에는 1,000만 명을 돌파한 것으로 보인다. 인구는 17세기 전후 동아시아 전쟁으로 크게 줄었으나, 농업 생산력의 향상과 온난한 기후, 『동의보감』과 같은 의학 서적이 발간되는 등 의술의 발달 등으로 18세기에 다시 늘어났다. 19세기 중엽에는 1,600만 명을 돌파한 것으로 추산된다. 인구가 늘자 많은 사람이 황해도와 평안도, 함경도의 삼북지방으로 유입되면서 이 지역의 개발이 촉진되었다. 

 

동의보감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에도 시대 일본의 인구 증가

     에도 시대의 일본에서는 개간과 간척 등을 통해 새로운 농경지를 확보하려는 노력이 이어져, 산비탈에까지 밭과 계단식 논이 들어서기도 하였다. 각지의 다이묘들도 세금 수입을 늘리기 위해 농민의 토지 개간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그 결과, 경지 면적이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이 시기에는 노동 집약적 농업이 발전하여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늘어나고, 농기구가 개량되고 비료 사용이 증가하면서 농업 생산력이 크게 높아졌다. 또 면화, 담배 등 상품 작물의 재배도 각지에서 이루어졌다.

     인구 증가도 두드러졌다. 결혼율과 출생률이 높아지고 생활 수준의 향상으로 사망률이 줄어들면서, 연 1%의 성장에 육박할 정도로 인구 폭발이 일어났다. 17세기 초 약 1,500만 명 정도였던 인구는, 전국 인구가 처음 조사된 18세기 초에 2,500만 명을 훨씬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는 인구 성장이 정체되었다. 다이묘의 수탈이 증가한 데다, 자연재해에 따른 흉작으로 기아가 만연하고 전염병마저 창궐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