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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율령과 유교

율령과 유교 

 

썸네일 - 율령과 유교

 

율령 도입과 진의 법치

     율령은 동아시아 사회에서 국가가 백성을 다스리는 주요 수단이었다. 율령에는 국가의 통치 조직, 관리의 복무 사항, 백성의 조세와 노역 등이 자세히 규정되어 있다. 처음에는 형벌 위주의 법률(율)이 중심이었으나, 점차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행정 법률(령)의 조항이 늘어났다. 율령은 넓은 지역에 걸쳐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지고 사는 사람과 다양한 지역, 복잡한 사회를 다스리기 위한 통일적인 기준 역할을 하였다.

     전국 시대에 상앙과 한비 등의 법가 사상가가 활약하였는데, 법가 사상은 율령의 제정에 영향을 주었다. 진은 상앙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책을 실시하고 중앙 집권화에 성공하여 전국 시대 최강의 나라가 되었다. 한비는 ‘인간의 본성은 본래 악하다.’라는 순자의 견해를 수용하여 백성을 법률로 강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법가 사상가들은 윤리와 도덕을 강조하는 공자의 덕치주의가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중국을 통일한 진의 시황제는 법가 사상가인 이사를 중용하여 엄격한 법치에 입각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진이 멸망한 이후에도 진의 법률은 한에 계승되었고 법치주의는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유교와 국가 통치 이념

     법가 사상에 기반을 두어 나라를 다스린 진이 멸망하자, 도덕과 윤리를 강조 하는 유교가 새로운 국가 통치 이념으로 떠올랐다. ‘덕이 있는 자가 하늘의 명령으로 군주가 된다.’라는 유교의 천명사상은 황제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권위를 뒷받침하였다. 또한 ‘효’와 ‘인’, ‘예’를 중시하는 유교 사상은 향촌 질서를 유지하고 백성의 자발적인 복종을 유도하는데 효과적이었다.

     한 무제는 동중서의 사상을 받아들여 유교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고자 하였다. 무제는 국가 기관으로 오경박사를 두어 오경을 가르치게 하였다. 또한 지방에서 추천을 받은 유교 지식인을 비롯해 유교 도덕에 충실한 인물을 관리로 임명하였다. 그 결과 유학의 교양과 덕목을 익힌 자가 관리가 된다는 원칙이 세워졌다.

     유교가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작용하면서, 국가를 정교한 법으로 통제하려는 생각과 가족 및 공동체의 질서를 존중하는 유교적 사고가 함께 율령에 반영되었다. 그렇지만 법가 사상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무제 역시 겉으로는 유교주의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엄격한 법치를 통해 나라를 다스렸다. 그 결과 한 대에 법가 사상과 유가 사상이 결합하여 통치 이념을 제공하였고, 가부장적 질서와 신분 질서, 연장자에 대한 우대 등을 위반하는 범죄를 가중해서 처벌하는 내용이 율령에 포함되었다.

 

 

 

 

율령의 정비

     진・한 대에는 범법자를 처벌하는 형벌 위주의 법률이 주로 시행되었으나, 점차 황제 중심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한 행정 법률이 늘어났다. 삼국 시대를 통일한 진에 이르러 전자는 '율', 후자는 '영'이라는 이름으로 구분되었다. 

     이후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따라 법 조항의 수가 점차 늘어났고, 복잡해진 법 조항을 체계화해 객관적이고 간편하게 정리하려는 움직임이 각 왕조에서 일어났다. 이는 수·당에 이르러 율령 체제의 완성으로 이어졌다.

 

 

수・당의 율령 정비와 당의 통치 제도

     수·당 대의 율은 이전 시대와 달리 신체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완화하여 매로 다스리는 태형과 장형, 노역을 시키는 도형, 유배를 보내는 유형, 목숨을 끊는 사형이란 5가지 형벌로 간소화하였다. 율은 사회 신분에 따라 차등적으로 적용되었고, 유교 윤리를 반영하여 불효에 해당하는 부자 사이의 범죄가 엄격히 처벌되었다. 영은 관리 선발, 행정 기구, 세금 징수 등 국가를 운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각종 제도와 규범에 대한 법령이다.

     수·당은 이전부터 존재하던 율령 이외에, 율령을 추가 보완한 ‘격’, 율·령·격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행할 것인지를 명시한 ‘식’ 을 새로 도입하였다. 이로써 율·령·격·식의 율령 체제가 완성되었다.

     수·당은 중앙에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의 3성을 두어 황제의 통치를 보좌하도록 하고, 상서성 밑에 6부를 두어 행정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지방에는 주·현을 설치하고, 토지 분배와 과세, 징병 등을 위해 호적을 작성하였다. 

     농민은 균전제, 조용조제, 부병제를 통해 지배하였다. 균전제는 일정한 기준 아래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하는 제도로, 토지를 받은 농민은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조용조라는 조세를 바쳤다. 또 성인 남성은 교대로 군역의 의무를 지는 부병이 되어 변경 수비, 도성 방어 등을 담당하였다. 이를 위해 국가는 전국의 백성을 파악하여 3년마다 호적을 작성하였다. 이러한 율령 체제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도 전파되어 이들 지역에서 통일 국가가 성립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아울러 수·당은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를 선발하기 위해 과거제를 시행하였다. 과거제의 시행은 귀족 세력의 견제와 황제권의 강화를 목적으로 하였다. 유학 교육을 위한 행정 기관으로는 국자감을 두고 오경 등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지방에는 공자를 모시는 문묘를 세우도록 하여 유교 이념을 널리 보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