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몽골 제국의 등장과 동아시아

몽골 제국의 등장과 동아시아 

 

썸네일 - 몽골 제국의 등장과 동아시아
몽골 제국의 등장과 동아시아

 

몽골 제국의 성립과 발전

     13세기 초 몽골 초원에 테무친이 등장하여 몽골계 부족을 통합하고 몽골 제국을 건설하였다(1206). 그는 쿠릴타이에서 칭기즈 칸으로 추대된 다음, 자신의 나라를 예케 몽골 울루스, 즉 대몽골 제국이라 불렀다. 칭기즈 칸은 친위대를 조직하고 천호제를 재편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초원 지역 유목민의 역량을 결집한 몽골의 군사력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먼저 서하를 공격하여 조공을 받고 금을 공격하여 굴복시켰다. 이어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왕국을 정벌하여 비단길을 장악하였다. 칭기즈 칸 사후 몽골 제국은 동으로는 금을 멸망시키고, 서로는 이슬람의 아바스 왕조와 동유럽의 키예프 공국을 점령하여 초원길을 손에 넣음으로써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쿠빌라이 칸 시기에는 수도를 카라코룸에서 대도(오늘날의 베이징)로 옮기고 국호를 원으로 바꾸었다(1271). 쿠빌라이 칸은 중국식 연호와 관료제를 수용하였다. 또 남송을 멸망시키고 일본과 베트남, 자와 등지에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원은 지방에 행성을 설치하고 각지에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정치를 감독하였다. 또한 주민을 몽골인, 주로 이슬람교를 믿던 서역계 색목인, 한인, 남인으로 분류하 여 다스렸다. 몽골인은 정치와 군사를 맡고, 색목인은 재정을 담당하며 지배층으로 군림하였다. 반면에 한인과 남인은 피지배층이었다. 특히 남중국인은 남인이라 불 리며 다른 계층보다 훨씬 무거운 부담을 져야 했다.

 

 

 

 

동아시아 각국의 대몽골 항쟁

     몽골은 고려에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다 몽골 사신의 피살 사건을 빌미로 고려에 침입하였다. 고려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장기전을 벌였고, 내륙에서는 백성이 치열하게 저항하였다. 최씨 무인 정권이 붕괴한 후 고려 정부는 몽골과 강화하고 개경으로 환도하였다(1270). 이후에도 삼별초를 중심으로 항전이 계속되었지만, 곧 진압되었다.

     베트남은 세 차례에 걸쳐 몽골의 침공을 받았다. 쩐 왕조는 수도인 탕롱(오늘날의 하노이)이 함락되는 등 위기를 맞았으나, 쩐흥다오의 활약으로 몽골군을 격퇴하였다. 이후 쩐 왕조는 몽골의 압박을 피하고자 조공을 바치고 강화하였다. 이어 몽골은 자와를 공격하는 등 군사적 위세에 힘입어 해상 교역로(바닷길)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몽골군은 고려를 복속시킨 다음 일본에 조공을 요구하였다가 거절당하자 고려·몽골 연합군을 편성하여 일본 정벌에 나섰다. 하지만 가마쿠라 막부의 저항과 폭풍우로 원정에 실패하고 말았다. 남송을 점령한 다음에도 일본에 더 많은 수의 원정군을 보냈지만, 이번에는 규슈에 제대로 상륙하지도 못한 채 폭풍우를 만나 실패하고 말았다.

     몽골의 침입은 동아시아 각국에 민족의식을 일깨우 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에서는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이 편찬되어 단군을 시조로 하는 역사관이 자리 잡았다. 베트남에서는 항전 과정에서 『대월사기』가 편찬되었으며, 항전의 승리로 민족적 자부심이 높아졌다. 일본에서는 ‘신의 특별한 가호를 받는다.’라는 신국 의식이 널리 퍼졌다.

 

몽골 제곡의 대외 정복 전쟁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교역망의 통합과 교류

     몽골 제국은 광대한 영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수도에서 각지에 이르는 도로망을 정비하였다. 주요 도로에는 일정 간격으로 역참을 설치하였다. 이를 통해 중앙의 명령이 제국의 전 지역에 신속하게 전달되었고, 지역의 사정이 중앙으로 보고되었다. 도로와 역참은 관료 및 군대의 왕래를 위한 것이었으나, 몽골 제국이 안정되면서 교역에도 큰 도움을 주었고, 여행자나 상인 등 일반인도 당국의 승인을 받아 이용할 수 있었다. 통행증을 지닌 사람은 누구나 역참에서 숙소와 식사, 말 등을 받아 안전하게 여행하였다.

 

역참의 통행증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몽골 제국의 등장으로 초원길이나 비단길에서 동서 교역을 독점하거나 방해하던 국가나 세력이 사라져 동서를 잇는 교역망이 안정되었고, 유라시아 대륙의 인적·물적 교류가 활성화되었다. 교역이 발달하자 단일 화폐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에 몽골 제국은 초기부터 교초를 발행하였다. 특히, 쿠빌라이 칸 때 발행한 교초는 금이나 은과 교환할 수 있는 안정적인 화폐였으므로, 몽골 제국 전역에서 널리 유통되었다. 

     동서 교역의 영향으로 문물의 교류도 활발해졌다. 초원길과 사막길(비단길), 바닷길을 따라 수많은 상인과 여행자가 오갔고, 이러한 동서 교류를 통해 서아시아의 천문학·역법·수학·지도학 등이 동아시아에 전해졌으며, 그 영향으로 수시력이 만들어졌다. 이슬람의 과학은 원을 거쳐 고려에 전해졌고, 조선에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칠정산』 등을 제작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인쇄술·나침반 등이 서아시아와 유럽에 전파되었다. 또한 몽골 제국에서는 개방적인 문화가 형성되었고,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가 상당한 교세를 얻었다.

     해상 교역도 활발하여 항저우, 취안저우, 광저우 등의 항구가 무역으로 번성하였다. 몽골 조정은 이들 도시에 시박사를 설치하여 동남아시아와 인도양으로 나가는 무역선을 관리하였다. 13세기에는 항저우와 취안저우를 중심으로 고려, 일본, 베트남, 동남아시아를 잇는 동아시아 교역망이 형성되었다. 동아시아 교역망은 동남아시아를 거쳐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인도양 교역망과 연결되고, 다시 지중해 교역망으로 연결되었다. 

     고려 또한 몽골 제국 중심의 유라시아 교역권에 포함되었다. 고려의 무역항인 벽란도에는 각지의 상인들이 수시로 드나들었으며, 고려 상인도 취안저우 등지로 나가 교역하였다. 이러한 교역에 따라 원의 교초가 고려에 유입되었으며, 고려에서는 상당량의 은이 유출되기도 하였다. 일본은 원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는 맺지 않았으나 활발하게 교역을 지속하였으며, 고려와도 교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