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북방 민족의 성장과 새로운 외교 질서

북방 민족의 성장과 새로운 외교 질서 

 

썸네일 - 북방 민족의 성장과 새로운 외교 질서
북방 민족의 성장과 새로운 외교 질서

 

새로운 국제 질서의 형성

     10세기 이후 동아시아에 새로운 국가들이 나타나 국제 질서가 재편되었다. 이전까지 절대적인 강자로 군림하던 중원의 당이 쇠퇴하고 주변 민족이 발흥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여러 나라가 다각적으로 상호 교류하는 다원적 국제 관계가 형성되었다.

      중원에서는 당이 멸망하고 5대 10국의 분열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혼란을 피해 화북의 주민들이 주변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이들을 따라 선진 문화가 전파되었다. 북방 민족은 그들을 받아들여 발달한 농경문화를 습득하였고 국가 체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10세기 초 거란족이 랴오허강 상류에서 국가를 수립하고 세력을 넓혀 갔다. 11세기 초에는 중국 서북 지역에서 탕구트족이 서하를 수립하였고, 12세기 초에는 만주의 여진족이 금을 세웠다. 이러한 북방 민족의 국가는 10세기 중반 중원을 통일한 송과 각축을 벌이며 다각적으로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한반도에서는 918년에 고려가 건국되어 후삼국의 분열을 수습하였다. 일본열도에서는 12세기 말 헤이안 시대가 끝나고 무사 정권이 들어섰다.

 

 

 

 

거란족의 국가 형성

     중원이 5대 10국의 혼란에 빠져 있던 시기, 북방의 초원 지대에서는 돌궐과 위구르가 쇠퇴하고 랴오허강 상류 일대에 거주하던 유목민인 거란족이 발흥하였다. 916년 야율아보기는 부족을 통일하고 거란을 건국하였다. 이후 거란은 동쪽으로 발해를 멸망시키고 남쪽으로는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 16주를 차지하여 송을 압박하였다. 11세기 초에는 송을 공격하여 매년 막대한 양의 비단과 은을 받는 조건으로 맹약(전연의 맹)을 체결하였다.

     거란은 국호를 ‘요’로 바꾸고 유목민에게는 고유의 관습을, 농경민에게는 중국적인 지배 방식을 적용하는 이원적 지배 체제를 채택하였다. 이를 북면관제와 남면관제라고 부른다. 또한 거란 문자를 제정하여 고유의 전통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불교를 숭상하였다.

 

 

 

 

탕구트족과 여진족의 발흥

     11세기 초 티베트 계통의 탕구트족이 서하를 세웠다. 서하는 비단길의 동부를 장악하고 동서 교역을 중계하며 발전하였다. 과거제 등 중국식 제도로 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독자적인 문자를 제정하여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려 하였다. 서하는 거란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어 평화를 유지하였지만, 송과는 책봉과 교역을 둘러싼 마찰로 오랫동안 전쟁을 벌였다. 송은 서하를 제압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맹약을 맺어 독립을 인정하고, 매년 비단, 은, 차 등 막대한 물자를 제공하였다(1044).

     12세기 초 만주 일대에서는 수렵과 농경에 종사하던 여진족이 발흥하여 아구다가 부족을 통합하고 을 세웠다(1115). 금은 연운 16주의 회복을 노리던 송과 연합하여 요(거란)를 멸망시키고, 이어 송의 수도 카이펑까지 함락하였다. 송은 화북 지방을 금에 빼앗기고 강남만을 지배하게 되었다. 금은 송(남송)을 굴복시켜 맹약을 체결하고 매년 막대한 물자를 받았다. 또한 금은 송에 신하를 칭하도록 하였으며, 고려와 서하도 압박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금은 요의 이원적 지배 체제를 계승하여 유목민은 맹안·모극제를 적용하고, 한족 등의 농경민은 중국식 제도인 주현제로 통치하였다. 금은 독자적 문자를 제정하고 여진족 고유의 풍습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점차 중원 문화에 동화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