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조공・책봉 관계의 형성_한 및 남북조 시대

조공・책봉 관계의 형성_한 및 남북조 시대 

 

썸네일 - 조공・책봉 관계의 형성
조공・책봉 관계의 형성

 

조공・책봉의 외교 질서

     은 흉노에게 패배한 후, 흉노의 왕에게 공주를 시집보내고 매년 많은 물자를 보내는 조건으로 흉노와 화친을 맺었다. 이때부터 중원의 왕조는 주변국과 외교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무제 이후 한이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하면서 대외 관계에 유교적 통치 이념과 화이관에 바탕을 둔 조공책봉의 형식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조공은 주변국이 중원 왕조에 예물을 바치며 형식적인 존중을 표명하는 행위이다. 이에 대해 책봉은 중원 왕조가 주변국의 군주에게 그 지배권을 선언적으로 확인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조공·책봉 관계는 직접적인 지배나 실제적인 간섭과 관련이 없는 형식적인 외교의 틀에 불과하였다. 한은 책봉이라는 명분에 집착한 반면, 주변국은 조공을 통해 한과 교류하며 문화적·경제적 실리를 취하였다.

     역대 중원 왕조는 군사적인 정복이 가능한 경우 적극적으로 원정을 감행하였다. 반면 조공·책봉 관계는 상대국의 존재를 현실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또한 각국의 대내외적인 필요에 따라 조공이나 책봉이 중단되는 경우도 많았다. 흉노나 서역의 국가들은 책봉 없이 교역이 필요할 때에만 사절을 파견하기도 하였는데, 한은 이를 조공이라 편의적으로 해석하였다. 이처럼 조공·책봉 관계는 서로의 필요에 따라 이루어진 의례적인 관계일 뿐이었다.

     조공·책봉 관계는 중원 왕조와 주변국 사이의 역학 관계에 따라 많은 굴절을 겪었다. 중원의 통일 왕조가 붕괴하거나, 혹은 초원 지대에 국가가 세워질 때는 북방민족이 주도하는 새로운 국제 질서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조공장면 - 보련도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남북조 시대의 다원적 외교

     3세기 초 후한이 멸망한 후 동아시아에는 새로운 국제 질서가 형성되었다. 중원의 통일 왕조가 붕괴하자 강대국 중심의 외교관계 대신, 상호 우호를 확인하기 위한 현실적이면서도 다원적인 외교가 국제 질서의 주된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고구려는 5호 16국 시대 화북의 여러 나라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다. 특히 소수림왕 때에는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장수왕 때에는 북조의 북위와 남조의 송에 모두 조공하였다. 이러한 외교를 통해 고구려는 만주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고 남진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5세기 고구려의 대외 교류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고구려가 세력을 확장하며 남진 정책을 추진하자 백제는 북조의 국가인 북위에 조공 사절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를 거부당한 백제는 북위에 대한 조공을 중지하고 주로 남조와 조공·책봉 관계를 유지하며 불교와 유학, 건축 기술 등을 수용하였다. 신라는 6세기에 백제의 중개로 남조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으나 한강 유역을 장악한 이후에는 남북조와 직접 외교 관계를 맺었다. 야마토 정권의 는 5세기에 국내의 정치적 정당성 확보를 위해 남조와 책봉 관계를 맺었으며, 6세기 후반에는 고구려, 백제 및 신라와도 사절을 주고받으며 문물을 수용하였다.

     북조와 남조도 서로 사절을 교환하였는데, 상대국의 사절을 조공 사절로 취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외교 관계는 6세기 중엽 초원 지대에 돌궐이 성장하면서 변화하였다. 북조는 돌궐과 친선을 맺기 위해 여러 차례 사절을 파견하였다. 북주와 북제로 분열된 다음 두 나라는 돌궐의 공주를 황후로 맞으려고 경쟁하였다. 북조의 뒤를 이은수와 당도 초기에는 돌궐에 신하를 자처하며 조공 사절을 파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