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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동아시아 지역 질서의 재편

동아시아 지역 질서의 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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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지역 질서의 재편

 

각 지역 통일 정권의 등장

     6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동아시아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몇 세기 동안 계속된 인구 이동과 그에 따른 새로운 국가 건설, 각국 사이의 전쟁 등이 마무리되면서 각 지역에 통일 정권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는 남북조를 통일한 이후 주변 지역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였다. 먼저 북방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중원을 압박하던 돌궐을 여러 차례 공격하여 중앙아시아에 진출하였다. 수는 고구려와 돌궐의 연계를 경계하였고, 통일 과정에서 불만을 가졌던 군대 세력을 달래 줄 필요가 있었다. 이를 해결하고자 대군(113만)을 동원해 고구려를 세 차례에 걸쳐 침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수는 고구려 원정의 실패가 주요 원인이 되어 멸망하였다.

     수의 뒤를 이어 들어선 또한 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고자 하였다. 당은 돌궐을 제압하고 서역을 정벌한 다음 고구려를 침공할 기회를 엿보았다. 이때 삼국 사이의 전쟁에서 수세에 몰린 신라가 당과의 동맹을 추진하였다. 신라와 당에 맞서 고구려와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하고 결국 멸망하였다. 백제 멸망 후 백제의 옛 땅에서 부흥 운동이 일어나자, 왜는 이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백강 전투에서 당과 신라군에 패하였다.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은 각지로 흩어졌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자 신라와 당 사이의 갈등이 표출되었다. 당은 신라를 포함한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고자 하였으나 신라는 이를 용인하지 않았다. 결국 양측의 대립은 전쟁으로 발전하였고, 신라는 고구려 유민과 함께 당 세력을 축출하고 통일을 완성하였다(676). 이후 신라는 한반도 지역을 안정적으로 지배하는 국가로 성장하였다. 또 당은 동아시아의 패자로 발전하여 당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형성하였다.

 

 

 

 

발해와 야마토 정권의 발전

     고구려의 옛 영토에는 발해가 건국되었다(698).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을 중심으로 세운 발해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하고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당 및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한반도에는 통일 신라와 발해가 병존하는 남북국 시대가 펼쳐졌다.

     6세기말 섭정이었던 쇼토쿠 태자는 중국과 한반도로부터 불교와 유학을 수용하여 ⌜17조 헌법(규범)⌟을 만들었다. 이를 통화화합과 불교, 그리고 군주의 명령에 따르는 것을 강조하였다. 

     일본 열도의 야마토 정권은 7세기 이후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하였다. 특히 7세기 중반 다이카 개신은 국가 체제의 확립에 큰 계기가 되었다. 이후 ‘천황’이라는 칭호와 ‘왜’를 대신하여 ‘일본’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아울러 선진 문물을 수용하기 위해 견당사와 견신라사를 활발하게 파견하였다.

     8세기에는 당의 수도 장안을 본떠 헤이조쿄를, 이어 헤이안쿄를 차례로 건설하였다. 헤이조쿄와 헤이안쿄에 수도를 두었던 시기를 각각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라고 부른다. 나라 시대에 일본은 당, 한반도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점차 주변 나라와 교류를 줄여 8세기말 견신라사를 폐지하고 이어 9세기말에는 견당사의 파견을 중지하였다.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 정치적으로는 율령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문화적으로는 궁정 귀족을 중심으로 일본 고유의 국풍 문화가 발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