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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인구 이동과 국가의 성립_북방 민족과 한족의 이동

인구 이동과 국가의 성립_북방 민족과 한족의 이동 

 

썸네일 - 인구 이동과 국가의 성립
인구 이동과 국가의 성립

 

인구 이동의 요인

     기원 전후 시기부터 7, 8세기경까지 동아시아 일대에서는 유목민과 농경민 모두 근거지를 떠나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는 대규모 인구 이동이 일어났다. 이 시기 중국과 만주, 한반도 지역에서 북으로부터 남으로 인구가 이동하였다. 특히 중국 북부 초원 지대에서 화북평원으로, 만주에서 한반도 북부와 중부로, 그리고 한반도에서 다시 일본 열도로 향하는 연쇄적인 인구 이동이 발생하였다.

     기후 변화와 그에 따른 자연재해로 나타난 생활환경의 변화, 인구 증가, 정치적 혼란, 부족 간 갈등과 국가 사이의 전쟁 등이 인구 이동을 자극하였다. 또 교류의 활성화도 인구 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새로운 문화와 접하면서 더 나은 생활 여건을 동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북중국 일대의 인구 이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정치적 혼란이었다. 2세기 중엽 이후 혼란이 장기간 계속되면서 변경의 방어가 소홀해지자, 북방 민족이 화북 지방으로 유입되었다. 한반도 일대에서는 부족 내 정치적 갈등이 인구 이동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주민의 유입은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다. 대규모 인구 이동이 이루어진 지역에서는 새로운 정권이 세워졌다. 또한 새로운 인구의 유입으로 생산력이 발달하고, 지역 간 교류가 활성화되었다. 때로는 토지와 하천 등을 둘러싸고 이주민과 토착민 사이에 갈등이 생겨나 그에 따라 2차, 3차의 인구 이동과 근거지 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북방 민족과 한족의 이동

     선비, 흉노 등 북방 민족의 활동 영역은 후한 중엽까지만 해도 초원 지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진시황제 때 건설된 만리장성은 북방의 유목민 거주지와 남방의 농경민 거주지를 구분하는 경계 역할을 하였다. 기원전 3세기 흉노가 초원 지대에 대제국을 건설하였을 때에도 그 영역은 만리장성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2세기 들어 후한이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워지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후한의 지배자들은 북방 민족을 끌어들여 군사적으로 이용하려고 하였다. 또한 변경의 방어가 느슨해지자 흉노, 선비 등 북방 민족이 북중국 일대로 들어와 화북 지방을 장악하였다. 한족은 이들을 5호(다섯 오랑캐라는 뜻으로 흉노, 선비, 갈, 저, 강족을 가리킴)라고 불렀다. 그중 선비족의 일파가 세운 전연과 후연은 요서와 지금의 베이징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 고구려와 랴오둥 지역을 두고 패권을 겨루기도 하였다. 5호가 세운 여러 나라는 5세기 초에 선비족의 또 다른 일파가 세운 북위에 의해 통일되었다(439).

 

5호의 국가 건설과 한족의 이동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한족은 5호에 화북 지방을 빼앗기고 이들의 지배를 피하여 대거 강남 지방으로 이동하면서 남중국 일대의 개발이 진척되기 시작하였다. 원래 창장강 하류 지역은 저습지가 많아 농경과 정착 생활에 불리하였다. 그런데 이주민의 유입으로 노동력이 늘어나고 선진 토목 기술이 도입되면서 강남 지방의 농업 생산력이 서서히 증대되었다. 한족은 강남 지방의 토착민과 협력하여 지금의 난징을 중심으로 동진을 세우고, 화북의 5호 정권과 대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