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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국가의 성립_유목 지대, 만주와 한반도, 일본 열도

국가의 성립_유목 지대, 만주와 한반도, 일본 열도 

 

썸네일 - 국가의 성립
국가의 성립

 

유목 지대

     유목 지대에서는 자연환경이 척박하고 식량이 부족하여 농경 지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가의 성립이 늦은 편이었다. 진이 중원을 통일할 무렵, 북방의 초원 지대에서 흉노가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스키타이의 기마 기술을 바탕으로 편성된 기마병은 기동력이 뛰어났으므로, 흉노는 군사적으로 성장하여 초원지대의 패자가 되었다. 흉노의 팽창과 남하에 위협을 느낀 진의 시황제는 이들을 오르도스 지역에서 몰아내고 그 북쪽에 만리장성을 쌓았다. 흉노는 진의 공격을 받아 근거지를 상실하고 큰 타격을 입었으나, 이러한 위기 상황은 오히려 기마술과 기동성을 갖춘 흉노 사회의 군사화를 촉진하였다.

     흉노 제국은 초원 지대에 흩어져 있던 여러 부족을 통합한 연맹체 국가로, 제국의 최고 군주는 ‘선우’라고 불렀다. 선우의 부인은 ‘연지’라고 불렀으며 황후에 해당한다. 선우는 특정 씨족 집단에서 배출되었으며, 그들과 혼인을 맺었던 몇 개의 인척 씨족이 있었다. 이렇게 혼인으로 결합한 군주와 인척의 씨족이 흉노의 핵심 지배층을 이루었다.

 

흉노 제국의 영역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흉노는 진의 멸망 이후 중원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다시 세력을 회복하였는데, 기원전 209년 묵특 선우가 즉위하면서 흉노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서쪽에 있던 월지를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내쫓고, 동쪽의 동호를 복속시켜 초원 지역을 통일한 동아시아 최초의 유목 제국을 건설하였다.  또한 남쪽 오르도스 지방과 북쪽 바이칼호 방면의 여러 세력을 정복하였다. 흉노가 자주 만리장성을 넘어 한을 공격하자, 한 고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떠났지만 대패하였다(평성의 치욕). 그 후 한은 필요한 물제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흉노와 화친을 맺었으며, 이러한 군사적・외교적 열세는 한 무제게 적극적인 대흉노 전쟁을 벌이기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흉노는 부족한 식량을 농경민과의 교역과 약탈로 충당하고, 동서 교역로인 비단길을 장악하여 발전하였다. 선우는 영역을 셋으로 나누어 자신이 중앙을 통치하고, 나머지는 좌현왕과 우현왕을 두어 각각 동방과 서방을 다스리게 하였다. 왕은 각자 영지와 1만 명 정도의 기병을 보유하였고, 소왕, 천장, 백장, 십장 등의 하위 조직을 거느렸다. 

     그러나 흉노는 한 무제의 공격으로 장기간에 걸친 전쟁을 치르면서 세력이 약해졌고, 후한 대에 선우 자리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여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서역과의 중계 무역 이익을 둘러싸고 후한과 다투던 북흉노는 2세기 중반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남흉노는 후한의 일부로 자리 잡고 국가 조직을 유지해 갔다. 이로써 300년간에 걸친 몽골 초원 지대의 흉노 패권인 마감되었다. 

 

 

 

 

만주와 한반도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서 성립한 최초의 국가였다. 고조선은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고 중원의 여러 나라와 교류하거나 대립하면서 성장하였다. 고조선의 통치자는 상의 왕과 마찬가지로 제사장을 겸하였으며, 왕 밑에는 비왕, 상, 경, 대부, 장군, 박사 등의 관직을 두었다. 기원전 3세기경에는 부왕과 준왕이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상·대부·장군 등의 관직이 설치되고 국가 체제가 정비되었다. 또 사회의 기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8조법」을 제정하였다.

• 사람을 죽인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
• 남을 다치게 한 사람은 곡식으로 갚는다.
• 도둑질한 사람은 노비로 삼는데 만약 용서를 받으려면 50만 전을 치러야 한다.
- 『한서』 지리지 -

 

「8조법」은 고조선 사회가 개인의 생명과 노동력, 사유 재산을 중시하였으며, 형벌과 노비가 존재한 계급 사회였음을 보여 준다.

     한 건국 초기의 혼란을 피해 위만이 연으로부터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에 들어왔다. 위만은 고조선의 변경 일을 담당하면서 세력을 키워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기원전 194). 이 무렵부터 고조선은 철기 문화가 본격적으로 수용되어 생산력이 크게 높아졌다. 이를 바탕으로 주변의 소국을 정복하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또한 한과 한반도 남부 지역의 여러 나라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주도하였다.

     만주와 한반도 전 지역에 철기가 보급되면서 여러 나라가 등장하였다. 만주 쑹화강 일대에는 예맥족이 세운 부여가 성장하여 연맹 국가로 발전하였다. 부여의 왕은 중앙을 통치하였으며, 전국을 크게 네 구역으로 나누어 각기 부족장이 다스리게 하였는데, 이를 사출도라고 한다.

     한반도 남부 지역에는 진국이 있었다. 이들은 점차 부족 연맹체를 형성하여 마한, 진한, 변한 등의 삼한이 성장하였다. 삼한은 수십 개의 소국이 형성한 연맹체로 농경이 발달하고, 군장 이외에 천군이라는 제사장이 따로 있어 소도를 다스리는 등 일찍부터 제정이 분리된 사회였다.

 

2세기 한반도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일본 열도

     일본 열도에서는 야요이 시대의 농업 생산력 발전에 힘입어 기원 전후로 여러 정치체가 등장하였다. 3세기경에는 일본 열도에 30여 개의 소국이 존재하였는데, 이 중 히미코 여왕이 다스리는 야마타이국이 가장 강성하였다. 히미코 여왕은 소국들 사이의 전쟁을 수습하고 종교적 권위를 이용하여 나라를 다스렸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