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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국가의 성립_중원지역

국가의 성립_중원지역 

 

썸네일 - 국가의 성립
국가의 성립

 

중원 지역의 국가 형성과 주의 발전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국가가 출현한 곳은 황허강 중류 일대이다. 문헌에 따르면 기원전 2000년경 황허강 중류 지역에 왕조가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하에 이어 기원전 1600년경에는 이 세워졌다. 상은 실재가 확인된 중원 지역 최초의 왕조이다.

     상은 여러 도시가 연맹하여 만든 나라였다. 상의 유적지에서 다량의 갑골문이 발굴되었는데, 갑골문은 상의 왕들이 제사장을 겸하며 종교적 권위에 의지하여 국가를 통치하였음을 보여 준다. 상은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하며 점차 세력을 확대하였지만, 상에 복종한 소국들의 국가 운영은 독립적으로 이루어졌다. 소국 중에는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였던 주가 기원전 11세기경 왕의 잘못된 정치에 반발한 여러 소국을 규합하여 상을 멸망시키고 중원 지역을 지배하였다.

 

상(은)의 세력 범위 지도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는 도읍 부근을 왕이 직접 통치하고 나머지 영토를 친족과 공신에게 나누어 주어 통치하게 하는 봉건제를 시행하였다. 주의 봉건제는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운영한 종법적 봉건제였다. 제후는 영토를 받은 대가로 왕에게 공물을 바쳤고 전쟁이 일어나면 군사력을 제공하였으며, 정기적으로 충성을 다짐하였다. 이에 주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엄격한 신분 질서를 형성하고 예를 강조하였다.

     주 왕은 자신을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천자라 부르고, 백성을 무력이 아니라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덕치를 강조하였다. 주가 상을 멸망시킨 것도 천명을 받아 하늘의 뜻을 실현한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주의 천명사상과 덕치주의는 나라를 다스리는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왕과 제후의 혈연관계가 멀어지면서 제후는 점차 왕의 통제에서 벗어났고, 그에 따라 주 왕의 권위도 약해졌다. 

 

주의 세력 범위 지도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춘추・전국 시대의 전개

     기원전 8세기 견융족이 서북쪽에서 침략하자 주는 수도를 동쪽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춘추 시대(기원전 770~기원전 403)라 하는데, 주 왕실은 제후를 통제할 힘을 상실하고 유력 제후, 즉 패자가 다른 제후들과 맹약을 맺고 왕을 받든다는 명분을 내세워 정치를 주도하였다.

     기원전 5세기에는 제후와 경・대부들 사이에서도 봉건 질서가 무너지면서 전국 시대(기원전 403~기원전 221)가 시작되었다. 전국 시대는 제후들이 스스로 왕이라 칭하면서 주변의 소국을 병합하고, 신하가 제후의 자리를 빼앗는 등 하극상과 전쟁이 계속된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춘추·전국 시대에는 우경과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어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었고, 제후들은 앞다투어 부국강병을 추진하면서 철제 무기를 도입하였다. 농업이 발달하여 남는 생산물이 많아지자 상업과 수공업도 발달하였다. 대상인이 출현하고 금속 화폐가 사용되었으며, 인구가 수십만에 이르는 대도시가 등장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제후들은 백성에 대한 지배력을 키워 군사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전쟁 규모가 커져 일반 농민도 병사로 동원해야 했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중앙집권적인 통치 방식이 발전하였다. 각 제후국은 관료제를 시행하여 신분을 따지지 않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관리로 뽑았고, 군주의 지방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군・현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는 군현제로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각국의 제후가 부국강병을 위해 능력 있는 인재를 경쟁적으로 모집하면서 인재 등용에서 능력이 중시되자, 지식과 학문을 갖춘 사계층이 크게 성장하였고, 다양한 개혁 방안을 주장하는 여러 사상가와 학파가 출현하였는데, 이를 제자백가라고 하였다.

 

춘추전국시대의 세력 범위 지도, 춘추5패, 전국 7웅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진의 중원 통일

     전국 7웅 중 하나였던 은 법가 사상가인 상앙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한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진은 문서를 사용하여 행정의 효율을 높이고, 법전을 만들어 엄격한 법질서를 확립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진은 전국을 통일하였다(기원전 221).

     전국을 통일한 진왕은 자신이 유일한 통치자임을 나타내기 위해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고 자신을 '시황제'라 칭하였다.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봉건제를 폐지한 후 전국에 군현제를 시행하였고, 도량형·화폐·문자를 통일하고 도로망을 정비하였으며, 만리장성을 쌓아 북방의 흉노를 견제하였고, 베트남 북부 지역을 공격하였다. 또한 사상을 통제하기 위해 분서갱유를 일으켰다.

     그러나 시황제가 죽은 후 진은 급속히 쇠퇴하였다. 환관이 권력을 휘둘러 정치가 문란해졌고, 대규모 토목 공사와 엄격한 법치에 대한 불만으로 진승・오광의 난 등 농민들의 봉기가 잇따라 일어났다. 

 

진의 영역 지도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한의 재통일

     진이 혼란에 빠지자 유방과 항우가 군사를 일으켜 다투었는데, 유방이 세운 이 중국을 재통일하며 새로운 왕조로 등장하였다(기원전 202). 한 고조(유방)는 중앙에 3공 9경을 두어 통치를 담당하게 하고, 지방은 진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군현제와 봉건제를 절충하여 군국제를 시행하였다. 그 후 한은 차츰 제후의 세력을 약화시고 군현을 확대하여 무제 때에 중앙 집권을 이루었다. 

     무제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주변 국가와 전쟁을 벌여 영토를 크게 넓혔다. 한은 무제 때부터 유학을 장려하여 유교적 교양이 있는 인물을 관리로 발탁하였는데, 지방의 호족들은 이를 활용하여 자제를 관리로 진출시킴으로써 점차 영향력을 키워갔다. 한 대의 유교는 군주권과 중앙 집권 체제의 강화를 뒷받침하는 사상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중원 왕주에서는 대체로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채택하였다.

     무제는 대외 관계에서도 큰 업적을 남겨 흉노를 북쪽으로 몰아내고 남비엣(남월)과 고조선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잦은 전쟁으로 국가 재정이 악화되자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상공업을 통제하고 소금과 철의 전매제를 시행하여 재정난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후 외척 세력이 대두하여 실권을 장악함으로써 왕권이 약해졌다.

     1세기 초에 외척인 왕망이 정권을 잡아 신을 세우고 한을 멸망시켰다. 그는 호족의 성장으로 발생한 각종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의 제도를 본뜬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농민 봉기로 신이 멸망한 후, 호족의 후원을 받은 전한의 왕족인 광무제가 한을 다시 세웠다(후한). 후한에서 호족의 세력은 더욱 성장하였다. 외척과 환관 세력의 권력 다툼이 이어졌고, 말기에는 황건적의 난을 계기로 각지의 유력한 호족들이 독립 세력화하여 서로 다투었다. 결국, 후한은 멸망하였고, 중원 지역은 위・촉・오의 삼국으로 나누어졌다. 

 

전한 초기 영역 지도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