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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인물] 고려를 지킨 명장, 강감찬

강감찬(姜邯贊)

948년 11월 19일(음력) ~ 1031년 8월 20일(음력)

 

강감찬(姜邯贊)은 고려의 문관이자 장군. 고려 전기 현종(顯宗) 대에 활약한 중신으로 제3차 고려 거란 전쟁 때 귀주대첩의 큰 승리를 이끌어 거란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강감찬의 '귀주대첩'은 고구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조선시대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대첩'이라 불린다. 

 

썸네일 강감찬
고려를 지킨 명장 강감찬

 

 

가계와 출사

     강감찬은 948년 11월 19일에 금주(衿州:지금의 서울 관악구 낙성대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탄생과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한 사신이 밤중에 큰 별이 어떤 집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가 사람을 보내 찾아보니 마침 그 집 부인이 사내를 낳았다. 그가 바로 강감찬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태어난 생가의 이름이 낙성대이다.

     아버지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일조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강궁진이다.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발한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983년(성종 3년)에 성종이 직접 복시(覆試)를 시행한 과거에서 갑과(甲科)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고려사』의 급제 기록까지는 이름이 ‘강은천(姜殷川)’으로 나오지만 이후의 관직 제수 기록부터는 ‘강감찬’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과거 급제 이후 이름을 바꿨던 것으로 보인다. 관직에 오른 후 예부시랑(禮部侍郞)·국자제주(國子祭酒)·한림학사·승지·중추원사·이부상서를 역임했다.

 

 

 

 

제2차 고려 거란 전쟁 

     1010(현종顯宗 원년) 거란의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내세워 서경(西京)을 침공하였다. 주력군을 이끌고 있던 강조가 통주(通州)에서 크게 패하고 서경마저 함락되자 조정에서는 항복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강감찬이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오늘의 일은 그 죄가 강조에게 있으니 근심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군세가 중과부적이니 그 예봉을 피했다가 서서히 이길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고려사(高麗史)』 <강감찬 열전> 중.

 

 

     왕은 나주(羅州)로 피신하여 사직을 보호하였다. 후에 현종은 친조를 조건으로 화의를 청하여 거란군은 철군했다. 그 과정에서 양규(楊規) 등 여러 장수들의 활약으로 거란군은 큰 피해를 입고 돌아갔다.

 

     전쟁이 끝난 뒤 강감찬은 피난을 건의한 공을 크게 인정받아 승진을 거듭하며 순탄한 벼슬길을 걸었다. 1018년(현종 9년)에 서경유수(西京留守)와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를 겸하게 되었는데, 그가 중앙 고관직을 받음과 동시에 서경유수를 겸했던 것을 보면 거란의 대규모 침입에 대해 확실하게 대비하기 위한 인물로 낙점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내사시랑평장사에 임명되었을 때 현종이 직접 임명교서를 써 주었는데, 

 

경술년에 오랑캐의 전란이 있어서 적들이 한강(漢江) 변까지 짚숙이 침범해 왔다. 당시 강공의 계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온 나라가 모두 야만인이 되었을 것이다.
『고려사』 <강감찬 열전> 중.

 

라고 치하하였다. 현종이 친히 교서를 써서 신하의 공적을 찬양한 기록이 명확히 남아있는 것은 양규와 강감찬 둘 뿐이다. 그리고 10월 서북면행영도통사가 되어 사실상 군사의 전권을 받게 된다. 

 

 

 

 

제3차 고려 거란 전쟁

     그해(1918년) 12월 거란은 고려 현종이 친조(親朝)하지 않은 것과 강동 6주를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삼아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해 제3차 고려 거란 전쟁이 발발했다.

     강감찬은 곧바로 상원수대장군(上元帥大將軍 총사령관)이 되어 대거란 방어 작전을 진두지휘하였다. 흥화진(興化鎭) 전투에서는 1만 2천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새끼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아두었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는 전술로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거란군은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후퇴하지 않고 목표인 수도 개경을 향해 계속 남하하였다. 하지만 거란군은 자주 내구산에서 추격적은 벌인 강민첨의 기병에게 대패하고, 대동강 가의 마탄에서도 조원에게 대패하였다. 결국 개경에서 멀지 않은 신은현에 도달했으나 개경을 함락할 수 없다는 첩보를 들은 소배압은 후퇴를 결심한다.

     고려군은 자주(慈州)와 신은현(新恩縣)에서의 협공으로 패퇴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연주(漣州)와 위주(渭州) 일대에서 거란군을 요격하여 5백 명 이상의 목을 베고, 마침내 귀주(龜州) 일대의 평야에서 거란군과 전면전을 개시하였다. 귀주는 압록강 이남 청천강 이북에 있는 강동 6주의 하나였다. 뒤쫓는 고려군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지만, 거란군 역시 물러날 길 없는 막판 전투였다. 그렇기에 양군은 막상막하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김종현이 이끄는 원군이 도착, 거란의 중심부로 전원 돌격하여 고려 본진과 함께 거란군을 완전 포위하고 순식간에 섬멸시켰다. 거란군은 완전히 참패하여 북으로 달아나 겨우 압록강을 건넜으나, 거란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 이 전투를 귀주대첩(龜州大捷)이라 한다.

 

     현종은 친히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대승을 거둔 강감찬을 극진히 환영하였다. 강감찬에게는 특별히 금으로 만든 꽃가지 여덟 개를 머리에 꽂아주고, 직접 손을 잡고 위로하였다고 한다.

    

     또한 강감찬은 전쟁을 마친 장군으로서의 의무를 잊지 않았다. 북방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기 위해 개성 외각에 나성(羅城)을 쌓을 것을 주장하고 관철시켜 국방을 더욱 튼튼히 하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고려는 10만의 거란을 물리친 강감찬의 귀주대첩 이후 대외적으로 위상을 인정받아 거란과 화친을 맺었다. 강감찬으로 인해 거란은 침략야욕을 버리게 되었고 여진이나 말갈 등의 변방 세력과도 균형을 유지하게 되었다. 고려는 동북아시아의 한 축으로서 120여 년 동안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업적은 높이 평가될 수 있다. 

 

 

 

 

상훈

    전란이 수습된 뒤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 食邑三百戶)에 봉해졌으며,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020년에는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特進檢校太傅天水縣開國子 食邑五百戶)에 봉해진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030년(현종 21)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이듬해 덕종(德宗)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개국후 식읍일천호(開府儀同三司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特進檢校太師侍中天水縣開國侯 食邑一千戶)에 봉해졌다.

 

 

 

 

사후

     1031년에 향년 8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강감찬의 묘는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사후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문종 때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충청북도 청주시 옥산면 국사리에서 묘지석을 발굴해 1968년 충현사가 건립되었다. 

     

     저서로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과 『구선집(求善集)』이 있으나 지금은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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