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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외환위기와 극복을 위한 노력

외환위기와 극복을 위한 노력 

우루과이 라운드(UR) 협상이 타결되고 쌀 시장 개방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자 농민들은 학생, 시민들과 함께 쌀 시장 개방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우루과이 라운드의 재협상과 국회 비준 거부, 대통령의 협상 무효 선언과 이행 계획서 제출 중단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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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와 극복을 위한 노력

 

시장 개방과 한국 경제

     전두환 정부는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중화학 공업에 대한 중복 투자 조정, 생산 전문화, 부실기업 정리 등의 정책을 폈다. 또한 한국 경제는 세계적인 3저 호황(저유가, 저달러, 저금리)으로 산업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었고, 기술 혁신, 첨단 산업 진출로 성장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회복되기 시작한 한국 경제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자동차와 기계, 철강, 반도체 등 기술 집약 산업을 중심으로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한편 1987년 이후 지속적인 노동 운동으로 노동 환경이 개선되고 임금 인상이 이루어지면서 삶의 질이 개선되었다. 서민의 구매력이 높아지고 내수가 확대되면서 민간 소비와 기업을 설비 투자도 증가하였다. 

     1980년대 들어서며 제1・2차 석유 파동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맞은 선진국들은 자유 무역을 추구하고 주변 국가에 농산물, 섬유, 철강, 금융, 지적 재산권 등 개발 도상국의 이해를 좌우하는 분야를 포함하여 전면적 시장 개방 압력을 강화하였다. 1993년에는 우루과이 라운드가 타결되었고, 1995년에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체제를 흡수・통합한 세계 무역 기구(WTO)가 출범하여 자유 무역이 확대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시장 개방 압력이 거세지는 가운데 한국 경제는 1990년대 전반까지 성장을 지속하였다. 세계적으로 전자, 통신 산업이 발전하면서 반도체의 수출이 급증하였고, 여러 기업이 러시아, 중국, 동유럽 등지로 활발하게 진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도 농산물 수입 자유화, 관세율 인하 등을 시작으로 단계적인 수입 개방을 추진하였다. 정부는 우루과이 라운드에 참여하면서 국제 금융 자본과 다국적 기업의 국내 진출을 허용하였다. 또한, 1996년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하는 등 급속한 세계화를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금융 규제가 완화되자, 극내 기업들은 해외에서 단기 외채를 들여와 국내 기업에 빌려주고 이윤을 남겼다. 기업들도 무분별하게 해외에서 자금을 빌리고 사업을 확장하였다.

 

 

 

 

외환 위기의 발생

     1990년대 김영삼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자본주의 선진국들이 주도하는 세계화 흐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97년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외환위기에 빠지면서 국내에서도 외채에 의존하여 방만하게 운영되던 기업들이 연쇄적으로 부도를 맞았다. 이 때문에 금융 기업들은 막대한 부실 채권을 떠안게 되었고 재무 건전성이 악화되었다.

     한국 경제가 위기를 맞자 외국 기업들은 국내 금융 기업에 채권 상환 기간 연장을 거부하였다. 정부가 보유하고 있던 외환을 공급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국가 신용도가 떨어지고 국제 단기 자금이 이탈하면서 기업과 금융 기관들은 해외 결제를 할 수 없게 되었고, 외환위기를 맞게 되었다. 결국 1997년 12월, 김영삼 정부는 국제 통화 기금(IMF)과 구제 금융 협약을 맺었 국가 부도 사태를 피할 수 있었으며, 이후에도 다른 국제 금융 기관과 여러 나라로부터 경제 지원을 받았다.

 

 

 

 

외환 위기의 극복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강도 높은 구조 조정을 실시하고 외국 자본 유치에 힘썼다. 부실기업과 은행을 통폐합하거나 외국에 매각하였고, 공적 자금을 투입하여 부실 금융 기관을 정상화하였다. 철도와 통신, 전력 등 주요 공기업을 민영화하거나 민간에 매각하고 재정 지출을 축소하였으며, 경영 혁신 등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정리 해고제와 파견 근로제를 도입하였으며, 고용 보험 확대와 근로 시간 단축 등의 노력의 전개, 국민 기초 생활 보장법을 시행하여 생활이 어려운 국민을 경제적으로 지원하였다.

     한편, 국민은 자발적으로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하여 외환 위기 극복이 힘을 보탰다. 전국 각지에서 수백 톤의 금이 모였고, 이는 부족한 외환을 보충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정부와 국민의 노력으로 한국은 예정보다 3년이 빠른 2001년에 국제 통화 기금의 지권금을 조기 상환하며 외환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외환위기와 구제 금융 지원 기간 중 치솟았던 환율이 안정되고 외환 보유액도 정상화되었다.

     2000년대 한국 경제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꾸준히 성장하여 2010년에는 세계 10대 무역국으로 성장하였다. 2004년 칠레를 시작으로 세계 여러 나라와 자유 무역 협정(FTA)을 체결하면서 거대 시장에 무역 장벽이 없이 접근할 기회도 얻게 되었다. 

 

금모으기 운동 사진
출처: 동아출판 고등학교 한국사

 

 

 

 

외환 위기가 남긴 고통

     외환위기로 한국 경제 구조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구조 조정이 실시되며 많은 기업과 은행이 외국 자본의 소유가 되었고, 수많은 노동자가 정리 해고를 당하면서 30~50대 연령층에서 실업자가 대량으로 발생하였고, 지속적인 정리 해고에 부담을 느낀 기업들이 고용을 줄이면서 20대 연령층에서도 실업이 늘어났다. 사무직과 전문직도 해고 대상이 되면서 고학력 무직자가 증가하였고, 원가 절감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여 비정규직이 증가하였다. 또한 많은 자영업자가 도산하면서 중산층의 비중이 낮아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업 회생을 위해 정부가 막대한 규모의 공적 자금을 투입하면서 국가 채무도 급증하였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부실한 재벌이 여럿 해체되었으나 살아남은 재벌들은 더 거대한 기업 집단으로 성장하였다. 일부 재벌들이 계열사에 일감을 몰아주면서 그 계열사와 경쟁 관계에 있는 중소기업의 경영이 악화되었고, 일부는 소비재산업과 유통업 부문까지 진출하여 영세 소기업과 영세 상인의 몰락을 부추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례는 기업들의 도덕적 해이 문제가 대두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한국 경제

     2000년대 들어 자유 무역이 전 세계에 확산됨에 따라 국가 간 무역 장벽이 낮아지고 상품, 노동, 자본 등 여러 분야의 이동이 쉬워졌다.

한국은 2004년 칠레를 시작으로 미국, 유럽 연합(EU), 중국 등과 자유 무역 협정(FTA)을 맺어 무역 시장을 확대하였다. 반도체, 액정 화면(LCD), 자동차, 철강, 석유 화학 등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가진 산업이 약진하였으며, 정보 기술(IT)에 기반을 둔 전자 및 통신 등 첨단 산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2016년 기준으로 세계 9위의 무역 대국으로 발돋움한 한국 경제는 높은 부가 가치를 창출하는 첨단 정보 산업 등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어 성장하고 있다.

 

 

 

 

한국 경제의 새로운 과제

     가속화되는 세계화로 한국 경제의 대외 무역 의존도는 더욱 높아졌다. 2007년 미국의 서민 주택 담보 파산 사태와 2009년 그리스 재정 위기로 국제 경기가 악화되었고, 이는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국내적으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가 더욱 크게 벌어졌고, 대기업이 자본력을 바탕으로 소상공업까지 진출하면서 서민 상권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또한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사회 계층 간의 격차가 점차 커지고 있다.

     농축산물 시장이 개방되어 값싼 외국산 수입이 크게 늘면서 농민 경제는 어려움에 처하였다. 도시와 농촌, 공업과 농업 간에 심화되는 불균형도 오늘날 해결해야 할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에 경제 민주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누구나 균등하게 기회를 보장받고, 공정하게 경쟁하며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