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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경제 성장과 사회 변화

경제 성장과 사회 변화 

 

썸네일 경제 상정과 사회 변화
경제 성장과 사회 변화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정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경제 제일주의를 내세웠다. 이를 위해 장면 정부가 수립한 경제 개발 계획을 수정・보완하여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을 추진하였다. 특히 성장을 우선시하는 경제 정책을 세우고 수출을 통해 이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은 자립 경제 기반 구축을 목표로 하였다. 이를 위해 전력, 석탄 등 에너지원을 확보하고, 시멘트, 비료 등 기간산업과 사회 간접 자본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였다. 또한, 신발, 의류 가발 등 낮은 임금을 이용한 노동 집약적 산업이 수출을 주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자본이 부족하여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정부는 외국 자본을 적극 도입하여 수출 주도산업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하였다. 이때 한・일 국교 정상화로 일본에서 유입된 자금과 서독 파견 광부와 간호사의 송금, 베트남 전쟁 파병으로 들어온 자금이 경제 개발에 큰 역할을 하였다.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7~1971) 시기에는 수출이 획기적으로 증가하고, 제조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이후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포항에 종합 제철 공장을 짓기 시작하였으며 경부 고속 국도 등 사회 간접 자본을 확충함으로써 경제 성장의 기반을 다졌다. 

     제1・2차 경제 개발 계획으로 한국 경제는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며 외형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외국 자본 도입으로 국가 부채가 늘어나고 대외 의존도가 심화되었다. 특히 1960년대 말에는 세계 경제 침체로 수출이 줄고, 환율이 올라 외채 상환 부담이 크게 높아졌다. 이에 정부는 1972년에 8・3 조치를 시행하여 기업에 상환 유예, 사채 동결 등 특혜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창원(마산) 일대에 자유 무역 단지를 조성하여 외국인의 직접 투자를 유도하고, 경제 성장 흐름을 이어 가려고 하였다. 

 

 

 

 

고도성장 이룩

     정부는 경공업 중심의 경제 성장에 한계를 느끼고 제3・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72~1981)에서는 수출 주도형 중화학 공업화 전략을 추진하였다. 포항, 울산, 창원 등 경상도 해안 지역에 철강, 화학, 기계, 조선 등 대규모 공업 단지를 조성하였고, 부족한 전력을 해결하기 위해 그 주변에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였다. 그 결과 한국 경제에서 중화학 공업 생산 비중이 점차 확대되었다. 이는 수출 증가로 이어져 1970년대에는 연평균 10%가 넘는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한국 경제는 석유를 비롯한 원자재 대외 의존도가 높아 두 차례의 석유 파동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1973년에 발생한 제1차 석유 파동은 중동 산유국들의 건설 투자 확대에 한국 기업들이 참여하여 '오일머니'를 획득함으로써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8년 일어난 제2차 석유 파동은 중화학 공업에 대한 과잉 투자와 부가 가치세 도입에 따른 물가 인상까지 겹쳐 한국 경제를 크게 위협하였다. 물가마저 폭등해 국민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유신 체제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점점 높아졌다.

 

 

 

 

경제 성장 속 구조적 취약성 심화

     1960~70년대 한국은 높은 경제 성장률을 보이며 고도성장을 이룩하였다. 정부가 경제 개발에 역점을 두고 외국 자본을 도입하여 수출 산업을 적극 육성하고, 기업인도 국제적인 인지도가 낮은 여건 속에서 국외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였다. 한국의 급속한 경제 발전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렸다. 이러한 경제 발전에는 국민의 교육열과 저축률이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국민들은 교육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높은 교육열을 보였다. 또한, 높은 저축률은 경제 개발을 위한 투자 자금 조달을 쉽게 하여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성장에 상응하는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동자는 여전히 낮은 임금과 열악한 작업 환경에 시달렸고, 빈부 격차도 커졌다. 또한 정부가 대규모 산업 시설을 영남 지방에 집중적으로 건설함으로써 지역 간 격차가 발생하였다. 산업이 급속히 성장한 도시와 개발에서 소외된 농촌 간의 소득 격차도 커졌다.

     정부가 경제 성장의 주도권을 쥐고 정책을 추진해 가는 과정에서 한국의 대기업은 1950년대 귀속 재산 불하, 외국의 원조 자금과 물자 분배 등에서 정부의 특혜를 받았다. 1960년대 박정희 정부는 자본과 기술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수출 중심의 경제 정책을 수립하였고, 수출업자에게 세제 혜택과 보조금 지급 등 막대한 지원을 하여 수출을 촉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대기업이 재벌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 중화학 공업을 중심으로 경제 구조를 전환하던 시기에 재벌 중심의 경제 체제가 강화되었다. 

     재벌은 정부의 수출 주도 경제 정책을 통해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여 한국 경제의 성장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부와 대기업 간의 부적절한 밀착 관계를 형성한 정경 유착이 지속되었다. 정부의 특혜를 받은 기업들은 주요 산업을 독점하여 한국 경제의 구조를 취약하게 하였고, 외국 자본을 유치하여 성장을 추진하면서 외채 부담이 증가하고, 내수보다 무역의 비중이 커지면서 경제의 대외 의존도가 심화되었다. 따라서 한국 경제는 세계 경제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노동 운동의 전개

     노동자는 1960, 70년대 경제 성장의 한 축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경제 성장에 치중하여 노동자의 권익과 노동 환경 개선에는 소홀하였다. 수출품 가격 경쟁력 유지를 위해 저임금 정책을 지속하였으며, 이에 노동자는 저임금과 장시간의 노동에 시달리며 생존권을 위협받았다.이러한 상황에서 1970년 11월에 일어난 전태일 분신 사건은 노동 운동 확산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사건 이후 섬유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 노동자를 중심으로 임금 인상, 노동 조건 개선, 어용 노동조합 민주화 등 노동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또한, 이 사건은 학생, 지식인 등이 노동 운동을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동 운동은 박정희 정부가 반정부 운동으로 몰아가며 강력히 탄압했고, 단체 교섭권과 단체 행동권을 제한하는 등 노동 운동을 억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 운동은 갈수록 활발해졌고, 그러한 가운데 큰 파문을 불러온 YH 무역 사건으로 유신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동일방직 사건 사진
출처: 동아출판 고등학교 한국사

 

 

 

 

성장에서 소외된 농촌

     경제 성장 과정에서 농촌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저임금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곡식 가격을 낮게 유지하였다. 그 결과 도시와 농어촌의 소득 격차는 점점 심해졌고, 생활이 어려워진 농민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주하여 농촌 인구는 급감하였다.

     도시와 농어촌 간의 소득과 문화 격차가 갈수록 커지자 박정희 정부는 1970년부터 농가 소득을 높이고, 낙후된 농촌을 근대화하여 도시와 농촌을 균형 있게 발전시킨다는 명분으로 새마을 운동을 실시하였다. 새마을 운동은 주택 개량, 마을 도로 확충, 하천 정비 사업 등을 펼쳐 농촌의 사회 간접 자본 시설 확충과 농가 소득 증대에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근면, 자조, 협동'을 강조한 새마을 운동은 도시까지 확대되었고, 점차 국민정신 운동으로 변화하면서 유신 체제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농민들도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농업 협동조합 민주화 운동, 농가 부채 탕감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특히 1970년대 후반 일어난 함평 고구마 사건은 농민 운동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새마을 운동 사진
출처: 동아출판 고등학교 한국사

 

 

 

 

도시화 진행

     산업화와 함께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면서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농민들은 대부분 안정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도시 빈민이 되었다. 이들은 산꼭대기 등에 '달동네'라 불리는 빈민촌을 이루었다. 이들 지역은 대부분 무허가로 이루어져서 생활환경이 열악하였다.

     한편 도시화가 진행되어 도시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빈민촌을 정리하고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1971년 광주 대단지 사건과 같은 도시 빈민의 저항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광주 대단지 사건 사진
출처: 동아출판 고등학교 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