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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세계사] 조선과 에도 막부

조선과 에도 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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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에도 막부

 

조선의 발전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신진 사대부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였다. 세종 대에는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민족 문화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자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수취 제도를 개혁하였다. 이후 일본과의 교류가 단절되었으나, 에도 막부의 요청으로 통신사를 파견하였고 왜관에서의 교류를 허용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군제와 세제의 지속적인 개혁과 농업 생산력의 증대로 상품 작물의 재배가 늘어나면서 상업 발달이 두드러졌다. 또한 이 시기에는 청과 서양 학문의 영향으로 실학이 일어나는 등 사상과 학문에서도 새로운 기운이 일어났다. 사회・경제적 변화와 신분 상승에 힘입은 서민의 성장으로 사설시조, 판소리, 탈춤, 민화가 유행하는 등 서민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무로마치 막부와 전국 시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에 개창한 무로마치 막부는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 쓰 때 남북조를 통일하고 전국적인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왜구 단속을 약속한 대가로 조공 무역인 감합 무역을 활발히 하여 경제적인 안정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점차 실권은 지방의 다이묘에게 넘어갔다. 무로마치 막부의 시대에는 서민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수리 시설이 정비되어 이모작이 전국으로 퍼졌고, 상공업자의 동업 조합인 자의 종류와 숫자가 현저하게 늘어났으며 화폐의 유통과 원거리 상업도 발달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다도와 꽃꽂이도 이 시기에 기초가 다져졌다.

     15세기 후반에 쇼군의 후계자를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 막부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100여 년에 걸친 전국(센고쿠) 시대가 전개되었다. 전국 시대에는 다이묘들이 막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패권 쟁탈전을 벌였다.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그가 죽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장악하고 에도에 막부를 열었다(1603).

 

 

 

 

에도 막부와 막번 체제

     에도 막부 시기에는 쇼군이 중앙과 각지의 직할지를 지배하였으며, 지방의 다이묘 들은 번이라고 불리는 영지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쇼군의 막부와 다이묘의 번으로 구성된 이 시기의 일본의 지배 체제를 막번 체제라고 한다.

     에도 막부는 엄격한 법규와 산킨코타이 제도를 통해 다이묘를 강력하게 통제하는 한 편, 천황과 귀족을 정치에서 배제하여 중앙 집권을 강화하였다. 에도 시대에 무사들은 병농 분리를 통해 농촌을 떠나 다이묘의 성을 중심으로 건설된 조카마치에 거주하였다. 상인과 수공업자는 무사의 군사 및 일상생활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조카마치에 모여 살며 조닌층을 형성하였는데, 무사 계급이 농민과 조닌(상공업자)을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상공업의 발전과 조닌 문화

     에도 막부 시대에는 개간 사업으로 경지가 확대되었고, 농기구와 시비법 등이 개량되어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각지에서 상품 작물이 재배되었다. 또한 막번 체제의 정비와 함께 전국적인 도로망이 정비되면서 상공업이 발전하여 각지에 도시가 발달하였다. 이에 따라 대도시를 중심으로 경제력을 갖춘 조닌층이 성장하여 조닌 문화로 불리는 서민 문화가 발달하였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자유로웠던 대도시의 조닌층은 점차 문화의 주체로 성장하여 특유의 조닌 문화를 발전시켰고, 이들의 문화는 다른 사회 계층으로 퍼져 나갔다.

     조닌 문화가 발달하면서 통속적인 주제의 문학 작품과 가부키라는 연극이 등장하여 인기를 끌었으며, 대도시에는 가부키를 공연하는 전용 극장이 들어섰다. 그림에서는 일상생활이나 풍경 등을 묘사한 우키요에가 발달하였다. 우키 요에는 목판에 새겨 대량으로 인쇄되어 서민들도 부담 없이 살 수 있었다.

     16세기경부터는 포르투갈 등 서양 상인이 동아시아에 진출하면서 일본인의 해외 진출이 활발해졌다. 에도 막부는 초기에 교역의 공신력을 높이고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해외로 나가는 상인들에게 무역 허가증인 슈인장을 주어 무역을 진흥시켰다(슈인장 무역). 그 결과 동남아시아 각지에 일본인 마을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에도 막부는 통치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크리스트교를 금지하고 사무역을 통제하는 쇄국 정책을 채택하였다. 다만, 예외적으로 네덜란드인에게는 나가사키를 개방하여 무역을 허용하였다. 이에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서양의 의학, 천문학, 조선술 등이 들어와 퍼졌는데, 이를 토대로 발 전한 서양 학문을 난학이라고 한다. 난학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면서 여러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네덜란드어로 된 해부학 서적을 일본어로 번역한 가이타이신쇼(해체신서)』가 그중 하나이다. 막부 말기에는 지방의 번들도 서양 군사 과학 기술의 우수성을 절감하고, 이를 경쟁적으로 받아들이려는 풍토가 생겨났다.

     에도 막부는 상하의 신분 질서와 예절을 숭상하는 성리학을 체제 유지를 위한 관학으로 중시하였지만, 양명학도 성행하였다. 18세기 후반에는 일부 학자들이 고전과 고대사연구를 통해 유교, 불교 등 외래 사상에 물들지 않은 고대 일본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국학 운동을 일으켰다. 이 국학자들 가운데 신도와 천황의 존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와, 후에 막부를 타도하려는 존왕양이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한편, 일본은 임진왜란 중 조선으로부터 활자, 그림, 서적 등을 약탈하였으며, 성리학자와 도자기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왔는데, 이는 에도 막부의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