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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세계사] 고대 서아시아 세계의 발전

고대 서아시아 세계의 발전 

 

 

 

서아시아의 통일

     티그리스강 상류의 작은 도시 국가에서 출발한 아시리아는 기원전 7세기 전반에 철제 무기와 우수한 기마병, 전차를 앞세워 서아시아 지역의 대부분을 통일하였으며, 한때 이집트까지 정복하였다. 아시리아는 전국을 주로 나누고 직할지에 총독을 파견하고 도로와 역전제를 정비하는 등 중앙 집권을 강화하였다. 제국의 곳곳에는 거대한 지구라트를 건설하였고, 수도 니네베의 왕궁에는 각지에 파견된 학자들이 수집해 온 많은 문헌(쐐기 문자로 기록된 점토판 문서)을 수납하는 왕립 도서관을 세워 학문 발전을 촉진하였다. 그러나 피정복민을 강제 이주시키고 무거운 세금을 매기는 등 강압적인 통치에 대한 피정복 민족의 반발로 멸망하였다. 이후 서아시아 세계는 다시 분열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발전

     기원전 6세기 중엽에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이 아케메네스 왕조를 수립하고 분열된 서아시아 세계를 다시 통일하였다(기원전 525). 기원전 6세기 중엽에는 기병과 궁병을 앞세운 키루스 2세가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면서 대제국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다리우스 1세는 반란을 평정하고 정복 전쟁을 펼쳐서 이집트와 지중해 연안에서부터 인더스강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왕조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대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전국을 20여 개의 속주로 나누어 총독을 파견하고, ‘왕의 눈’, ‘왕의 귀’로 불린 감찰관을 보내 총독을 감독하였다. 또한 왕의 명령을 빨리 전달하고 세금과 공물을 효율적으로 거두기 위해 ‘왕의 길’로 불리는 도로를 건설하고 역참을 정비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그 외에도 무역 발전을 위해 화폐 및 도량형 제도를 통일하고,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를 최초로 건설하였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아시리아와는 달리 피지배 민족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공납을 징수하는 대신 그들의 전통과 신앙을 존중하였고, 페니키아인들의 무역 활동을 보호하였다. 이러한 관용 정책에 힘입어 이후 약 200년 동안 페르시아는 통일과 번영을 누렸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중앙 집권적인 통치 질서와 조로아스터교를 비롯한 문화는 주변 지역으로 전파되어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지중해 해상권 장악을 둘러싸고 벌인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패하고 총독들의 반란이 일어나 점차 쇠약해지다가 기원전 4세기 무렵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당하면서 멸망하였다(기원전 330).

 

아시리아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영역 지도
출처 - MiraeN 고등학교 세계사

 

 

 

 

 

 

 

 

파르티아의 번영

     알렉산드로스 제국이 분열된 이후 제국의 서쪽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지만, 동쪽에서는 이란 계통의 파르티아가 등장하였다. 파르티아는 페르시아어와 문자를 사용하는 등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기원전 2세기경 파르티아는 전성기를 맞이하여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더스강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파르티아는 정복지 주민들을 관대하게 통치하였으며,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크테시폰(파르티아의 수도)을 중심으로 로마와 중국의 한, 인도의 쿠샨 왕조를 연결하는 동서 무역로를 장악하여 중계 무역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로마 제국, 인도의 쿠샨 왕조 등과의 대립으로 쇠퇴하다가 3세기에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멸망하였다(226).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발전

     3세기 초 이란 계통의 농경민이 세운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부흥을 내걸고 4세기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인더스강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로마 제국과 끊임없이 대립하였으나 사막길과 바 닷길을 이용한 동서 교역의 요충지를 장악하여 중국과 로마 사이의 중계 무역을 통해 크게 번영하였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서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았으며, 조로아스터교와 불교, 크리스트교 등 외래 종교를 융합한 마니교도 나타났다. 또한 아람어와 쐐기 문자를 비롯한 다양한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였고, 지방에 총독을 파견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그리스, 인도 등 주변 지역의 문화를 융합해 독특한 페르시아 문화를 발전시켰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의 왕궁 유적에는 페르시아가 정복한 여러 나라의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 특히,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금은 공예품과 유리, 염색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했고, 페르시아 문화는 사막길(비단길)과 초원길을 통해 이슬람 세계와 비잔티움 제국,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분열 이후 비잔티움 제국과의 계속된 전쟁과 왕실 내분으로 쇠퇴하다가 정통 칼리프 시대의 이슬람 세력에 멸망하였다(651).

 

파르티아와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영역
출처 - MiraeN 고등학교 세계사

 

 

 

 

국제적인 페르시아의 발전

     페르시아인들은 기원전 6세기경부터 예언자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에 기반을 두어 창조주 아후라 마즈다를 섬기는 조로아스터교를 널리 믿었다. 조로아스터교는 이원론의 입장에서  세상을 (광명) 신인 아후라 마즈다와 (암흑) 신인 아리만의 대립으로 보았다. 인간은 선의 신에게 은혜를 입어 최후의 심판을 통해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다. 페르시아인들은 선한 신의 승리를 믿었기 때문에 선한 신의 상징인 불을 숭배하였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조로아스터교를 널리 믿었는데, 다신교가 지배적이었던 시대에 숭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참신은 아후라 마즈다뿐이라는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또한 조로아스터교는 영토 확장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했기 때문에 페르시아가 동서로 팽창하는 데에도 중요한 동력을 제공하였다. 

     아케메네스 왕조에서는 여러 민족의 문화를 융합하여 국제적인 성격을 띤 문화를 이룩하였다. 특히 건축과 공예 부문에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페르세폴리스에 남아 있는 유적과 유물에는 페르시아가 정복한 여러 나라의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고 민족의 정통성을 강조하였고, 시기에 경전 아베스타 집대성되었다. 한편,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서는 세계주의적 종교인 마니교가 나타났다. 마니교는 동방에서 전해진 불교와 서방에서 전해진 크리스트교(경교) 등의 외래 종교가 조로아스터교와 융합되어 성립되었다. 마니교의 가르침은 크리스트교와 불교 사상을 수용하여 현세를 부정하는 금욕주의와 정신주의적 성향이 강해 당시 국가와 결합하여 세속화가 진행되던 조로아스터교와 대립하였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서 이단으로 탄압을 받은 마니교는 중앙아시아와 중국에 전해졌다.

     페르시아 문화는 사산 왕조 시대에 번영하여 서아시아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이후 오랫동안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건축・공예에 뛰어난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은그릇, 유리그릇, 견직물, 도자기의 기술과 양식은 서아시아 세계는 물론 동쪽으로는 중국, 한국,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