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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세계사] 명・청의 건국과 발전

명・청의 건국과 발전 

 

썸네일 명청의 건국과 발전
명・청의 건국과 발전

 

명의 성립

     14세기 중엽에는 중국 각지에서 원의 지배에 저항하는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명을 세운 주원장도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 홍건적의 반란에 가담하였다가 강남 일대의 반원 세력(농민 반란군)을 규합하여 금릉(난징)을 수도로 명(明)을 세우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1368). 이어 몽골 세력을 만리장성 북쪽의 초원 지역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하여 한족 왕조를 부활시켰다.

     태조 홍무제(주원장)는 유교 중심의 한족 문화 부흥을 추진하여 몽골 풍습인 호복과 변발을 금지하는 한편, 학교를 세우고 과거제를 정비하였으며, 유교적 윤리 규약인 육유(六諭)를 반포하여 백성을 교화하고자 하였다. 원 말 황폐해진 농촌을 재건하고 관리의 수탈을 줄이기 위해 지방의 농민을 이갑제로 편제하여 농민이 직접 조세 징수와 치안 유지를 담당하게 하였다. 토지 대장(어린도책)과 조세 대장 겸 호적 대장(부역황책)을 정비하여 이를 바탕으로 조세와 역을 관리하였다. 또한 중서성과 재상제를 폐지하고 6부를 황제에 직속시켜 행정·군사·사법·감찰 등 모든 정보와 권한이 황제에게 집중되었다. 늘어난 황제의 업무를 보조하기 위해 황제의 비서・고문 역할을 하는 대학사를 두었다.

 

 

 

 

명의 발전과 쇠퇴

     황제의 위상과 명의 국력은 영락제 때 절정에 이르렀다. 영락제는 자금성을 건설하고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고 대외 팽창 정책을 추진하였다.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수차례에 걸쳐 북쪽의 몽골을 공격하였으며, 왜구를 토벌하고, 베트남을 점령하였다. 또한 영락제는 환관 정화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대규모 항해를 추진하게 하였다. 이를 통해 명은 국력을 과시하면서 동남아시아와 인도 및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진출하여 조공 체제의 확대를 시도하였다. 영락제는 강남의 물자를 수도로 운송하기 위해 대운하를 새롭게 정비하였다. 영락제는 능력이 뛰어난 문관을 선발하여 황제의 자문은 담당하게 하였다. 이들을 내각이라 하였는데, 이후 내각은 황제를 보좌하면서 점차 권한을 늘려갔다.

     영락제 사후 무능한 황제 밑에서 환관이 득세하면서 정치적 혼란이 심하였다. 북쪽에서는 몽골이, 남쪽에서는 왜구가 자주 침입하는(북로남왜) 등의 외부 위협에 시달렸고, 이를 막기 위한 만리장성 보수는 막대한 재정 부담을 초래하였다. 16세기 후반 이갑제가 무너지면서 내각 대학사 장거정이 일조편법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등 재정 개혁을 성공적으로 실행하였으나, 장거정이 죽은 후에 환관의 횡포는 더욱 극심해지고 다시 재정난이 발생하여 국력은 회복되지 못하였다. 더구나 임진왜란 참전과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를 진압하는데 많은 재정을 지출하였고, 17세기 들어 만주 지역의 여진족이 강력한 위협으로 성장하면서 방위 비용도 증가하였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농민에게 많은 세금을 부과하였고, 이에 맞서 각지의 농민들이 저항하였고, 결국 명은 이자성의 농민군이 베이징을 점령하면서 멸망하였다(1644).

 

 

 

 

청의 건국과 발전

     임진왜란 이후 명과 조선이 쇠퇴한 틈을 이용하여 누르하치(청 태조)는 팔기제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키워 여진족(만주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웠다(1616). 이후 후금은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홍타이지(태종)는 몽골과 조선을 공략하고 국호를 청으로 바꾸었다(1636). 청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순치제 때 명이 멸망하자 만리장성을 넘어 베이징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고(1644), 이후 중국 전역을 장악하였다. 이후 청은 투항한 한족의 협력을 얻어내면서 장기간의 정복 전쟁을 통해 명 대보다 훨씬 넓은 영역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청은 강희제,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로 이어지는 130여 년간의 시기에 전성기를 누렸다. 강희제는 오삼계 등이 일으킨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중국 지배를 공고히 하였다. 또한 타이완의 반청 세력을 제압하고, 시베리아에 진출한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국경을 확정하였으며 외몽골과 티베트를 복속시켰다.
강희제의 뒤를 이은 옹정제는 군기처를 설치하고 비밀 상주문 제도를 도입하여 모든 정보와 정책의 결정권을 장악함으로써 황제 독재권을 강화하였고 지정은제를 통해 조세 제도를 정비하였다.

 

청의 최대 영역 지도
출처 - MiraeN 고등학교 세계사

 

 

 

 

 

다민족 제국의 건설

     뒤를 이은 건륭제에 이르러 청은 장기적인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주변 지역에 대한 정복도 계속하여 티베트와 신장, 몽골 등 청의 최대 영토이자 오늘날 중국 영토의 대부분을 이 시기에 확보하였다.

     청은 동아시아나 동남아시아의 주변국들과 전통적인 조공・책봉 체제를 강화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질서를 주도하였다. 이러한 질서 밖에 있던 일본이나 서양 국가들과는 무역을 통한 교류가 허용되었다. 18세기 중반, 건륭제는 서양 선박의 내항을 광저우항으로 제한하고 공행이 무역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건륭제 말기부터 농지가 부족하여 백성의 생활이 어려워지는 등 여러 사회 문제가 나타났다. 건륭제 퇴위 이후에는 백련교의 난(1796~1804) 이후 만주족의 지배력은 약화하였다.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재정은 악화되고 팔기제의 한계도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이후 청은 점차 국력이 약화하였다.

 

 

 

 

 

청의 중국 지배

     청은 청은 만주족과 몽골족 외에 다수의 한족과 다양한 소수 민족을 포함하는 다민족의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만주족의 우위를 전제로 한 청은, 직할지에서는 군현제를 통해 한족을 직접 지배하였고, 티베트・몽골・신장 등의 주변부(번부 지역)와 소수 민족에 대해서는 토착 지배자를 이용하는 간접 지배 방식을 채택하였다. 만주 문자를 만들어 고유문화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한편, 한자·몽골어·티베트어 등을 공용으로 사용하는 포용 정책을 펼쳤다. 청은 조선, 베트남 등 주변 국가와 책봉·조공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동아시아 질서를 주도하였다.

     소수의 만주족이 세운 청은 중국을 통치하며 강경책과 회유책을 적절히 사용하여 압도적으로 다수인 한족을 다스렸다. 청은 만주족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만주족의 풍속인 변발과 호복을 강요하고, 만주족을 비난하거나 오랑캐로 여기는 서적을 모두 금서로 지정하고 한족의 사상을 억압하는 등 가혹한 탄압(문자의 옥)을 하였다. 동시에 청은 회유책의 일환으로 유교 문화를 존중하여 과거제를 그대로 시행하고, 중요 관직에 만주족과 한족을 함께 임명하였다(만한 병용제). 또한 지배층이었던 신사층의 특권을 인정하여 그들의 협조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전에 편찬된 책을 경(유학)·사(역사)·자(사상)·집(문학)으로 분류하여 『사고전서』를 간행하는 등 대규모 편찬 사업을 벌여 한족 문화를 보존하고 청 왕조 비판을 통제하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