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세계사

[세계사] 몽골 제국과 동서 교류

몽골 제국과 동서 교류 

 

썸네일 몽골제국과 동서 교류
몽골 제국과 동서 교류

 

몽골의 세계 정복과 원제국

     13세기 초 몽골이 대두하면서 유라시아 대륙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테무친은 여러 부족이 흩어져 있던 몽골 지역 유목민을 통합하고 쿠릴타이를 열어 '세계의 지배자'라는 뜻의 칭기즈 칸으로 추대되었다(1206). 그는 천호제라는 체계적인 군사·행정 조직을 바탕으로 정복전쟁을 벌여 몽골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엄격한 법령을 통해 강력한 군주권을 마련하여 몽골 제국의 토대를 닦았다.

     정복 활동에 나선 칭기즈 칸의 원정군은 서하와 금을 공격하였다. 이어 호라즘 왕국을 무너뜨리고 중앙아시아를 정복하였다. 칭기즈 칸의 뒤를 이은 칸들도 정복 전쟁을 계속하여 동해에서 서아시아와 폴란드, 헝가리 국경까지 영역을 확대하여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고, 유목 세계와 농경 세계를 통합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칭기즈 칸 사후 몽골 제국은 그의 후손들에 의해 여러국가(울루스)로 분열되어 점차 독자적인 지배를 하는 느슨한 연합체로 바뀌었으나 대칸을 중심으로 몽골 제국은 계속 팽창하였다. 제2대 오고타이 칸은 금을 멸망시켰고(1234), 뒤를 이은 칸들이 러시아와 유럽 일부 지역을 점령하였고 또 홀라구는 바그다드를 함락하여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키며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쿠빌라이(세조)가 대칸으로 즉위한 뒤 국호를 원(元)이라 정하고(1271), 이듬해 수도를 대도(현재의 베이징)로 옮겼다. 이어 남송과 대리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여(1279) 유목 민족 최초로 중국 전역을 지배하였다.

     쿠빌라이 칸 이후 원은 황위 계승을 둘러싼 내부 분쟁에 시달려 통합력이 약화 되었다. 지배층이 사치와 낭비를 하고, 티베트 불교인 라마교가 유행하면서 법회를 개최하는 데 국고를 소모하는 등 재정이 악화되었다. 이를 해결하고자 무거운 세금을 거두고 지폐인 교초를 남발하여 물가가 크게 올랐다. 이러한 가운데 생활이 어려워진 농민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원은 백련교도가 중심이 된 홍건적이 난을 일으켰다. 결국 원은 명을 세운 주원장에 의해 북쪽으로 북쪽으로 밀려났다(1368).

 

원과 4울루스 지도
출처 - MiraeN 고등학교 세계사

 

 

 

 

 

 

 

 

 

원의 중국 지배

     원은 관료제와 주현제 등 중국의 전통적인 제도를 채용하였지만 몽골 제일주의의 원칙에 따라 여러 민족을 구분하여 통치하였다. 소수의 몽골인은 최상층으로 국가의 중요 정책과 행정을 담당하였으며, 서방계의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한 색목인은 대부분 상업과 회계 등 재정 관리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한편 금의 지배를 받았던 한족이나 기타 민족을 한인, 남송의 지배 아래 있었던 한족을 남인으로 분류하여 지배하였는데, 그중 남인은 가장 심한 차별을 받았다. 한인과 남인은 조세를 더 많이 부담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리 등용에서도 불이익을 받았다. 과거제는 폐지되었다가 후기에 가서야 부활하여 사대부가 활약할 기회가 적었다. 그러나 지주 전호제는 더욱 발전하여 지방에서 사대부의 지주로서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원의 경제와 문화

     원 대에도 농업 생산이 장려되고 목화 지배가 전국으로 확대되어 면직업이 발달하였다. 활발한 동서 교류와 상업의 발전으로 남송의 수도였던 임안(항저우)은 더욱 눈부신 번영을 누렸다. 대운하가 수리되어 항저우에서 대도까지 수로가 연결되었고, 해운도 편리해져 수백만 석의 곡물이 육로와 해로를 통해 운송되었다. 또한 원은 동 생산량의 부족을 보완하고 교역의 편의를 위해 지폐(교초)를 발행하였다. 한자와 몽골문자(파스파 문자)가 함께 인쇄된 교초는 원 제국 안에서 널리 통용되었다.

     원대에는 서민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원의 극심한 민족 차별 정책으로 관직 진출이 어려웠던 한족 지식인은 문화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구어체로 쓴 소설과 희곡이 인기를 얻었고, 잡극이 발달하였다. 특히 도시민은 연극 공연을 즐겨 『서상기』, 『비파기』, 『두아원』을 비롯한 원곡(연극)이 큰 인기를 끌었다. 원은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여 다양한 민족을 다스리면서 관대한 종교 정책을 취하였다. 이에 이슬람교, 네스토리우스교(경교), 크리스트교, 라마교 등의 다양한 종교가 공존할 수 있었다. 특히 라마교는 황실의 장려에 힘입어 몽골인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라마교 승려 파스파는 몽골 문자(파스파 문자)를 만들기도 하였다. 

 

 

 

 

 

 

 

 

동서 문화의 교류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 지역을 거의 통합하여 초원길, 사막길 등 동서 교역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광대한 제국을 원활하게 통치하기 위해 교통로를 정비하고 안전 확보에 힘써 제국의 곳곳에 역참을 설치하여 중앙과 지방 각지를 연결하였다. 도로망과 역참망의 설치로 사절이나 관리, 군대 등 공무 인원의 여행과 물자 수송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고, 신속한 공문서 전달도 가능해져 중앙의 지배력이 멀리 뻗칠 수 있었다. 몽골 제국이 안정되면서 상인뿐만 아니라 서양의 선교사와 학자들도 이용하였다. 또한 강남의 쌀을 화북으로 운반하기 위해 대운하를 정비하여 항저우와 대도(베이징)를 연결하였다. 해상 무역은 더욱 발전하여 항저우・취안저우・광저우와 같은 항구 도시가 번창하였고, 강남에서 톈진에 이르는 연안 해운이 발달하였다. 이 시기 이슬람 상인은 육로와 해로를 오기며 원거리 무역을 주도하고 교역망 확대에 기여하였다. 몽골 제국은 강력한 군사력과 이슬람 상인의 협력에 힘입어 ‘몽골의 평화 시대’라고 불리는 번영을 누렸다.

     이 시기에는 바닷길을 통해 인도양을 거쳐 아라비아반도, 아프리카 동부에 이르는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수도 대도(베이징)는 대륙과 해양이 하나로 연결되는 유라시아 교역망의 중심이 되었다. 베네치아의 상인인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 칸을 알현하고 돌아가는 일정에서 보고 들은 것을 구술・출판한 『동방견문록』은 유럽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모로코 출신 이슬람교도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중국 등지를 여행하고 『여행기』를 남겼다. 한편, 몽골의 네스토리우스파 크리스트교였던 랍반 사우마는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위해 출발했다가 유럽 각지를 순방하였다. 서역 상인이 자주 왕래하여 물자 교류가 활발하였으며, 화폐 사용이 늘어 교초가 널리 사용되었다. 이러한 왕래와 교류를 통해 중국의 화약, 나침반, 인쇄술 등이 서양에 전파되었고, 이슬람의 천문학과 수학 등이 중국에 전해졌다. 이슬람 역법을 활용하여 곽수경이 만든 수시력은 중국 달력의 정확도를 한층 높였고, 대도에 천문대와 천문 관측 기구를 만들었다. 이슬람의 대포 제작 기술도 중국에 유입되었다. 중국의 회화는 페르시아의 세밀화에 영향을 끼쳤다.

 

마르코폴로와 이븐 바투타의 여행경로 지도
출처 - MiraeN 고등학교 세계사

 

 

 

 

[세계사 속으로] 실크로드

실크로드 | 교역의 길, 문화의 다리 실크로드는 대항해시대 이전 중국 대륙과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지중해 세계를 잇던 고대 교역 경로이고 이러한 경로를 통해 연결되었던 교

bigdipper.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