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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세계사] 수・당 제국의 발전

수・당 제국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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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 제국의 발전

 

수의 중국 재통일

     약 4세기 동안 분열되었던 중국은 북주의 승상이었던 양견(수 문제)이 북주를 무너뜨리고 수(隋)를 세운 후, 남조의 진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재통일하였다(589). 수 문제는 중앙 관제를 3성 6부제로, 지방 조직을 주현제로 정비하여 중앙 집권을 강화하였다. 지방의 인사권도 중앙으로 흡수하여 9품 중정제를 폐지하고 시험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제를 시행하였다. 이러한 조치로 문벌 귀족 세력이 약화되었다. 또한 위진 남북조 시대 각국에서 시행된 균전제, 조용조, 부병제를 새롭게 정비하여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고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이렇게 정비된 율령 체제는 당으로 이어져 많은 영향을 끼쳤다.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는 남과 북을 수로로 연결하는 대운하를 완성하였다. 대운하는 급격히 성장한 강남의 경제력을 화북 지방과 연결함으로써 남북 간 물자 유통과 경제통합을 촉진하였다. 하지만 토목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의 불만이 커졌고, 대외 진출을 꾀하여 돌궐을 제압하였으나, 대규모 군사를 동원한 고구려 공격이 실패하면서 수는 점차 쇠퇴하였다. 이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건국된 지 37년 만에 수는 멸망하였다(618).

 

 

 

 

당의 발전

     수 말기 반란이 각지로 확산되자 장군 이연(고조)은 장안을 수도로 삼아 당(唐)을 건국하였다(618). 뒤를 이은 이세민(태종)은 각종 제도를 정비하여 당 제국의 기반을 공고히 하고, 대외 팽창에 나서 동돌궐과 그 지배하에 있던 서북 지방의 북방 민족을 복속하여 중국과 북방 유목민의 왕을 의미하는 ‘천가한’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또한 수의 율령 체제를 계승・정비하여 ‘정관의 치’라고 일컫는 태평성세를 이룩하였다. 고종 때에는 서돌궐을 예속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여러 국을 정복하였으며,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영토를 더욱 확장하였다.

     당은 광대한 영역을 통치하기 위해 직접 지배하기 어려운 주변 민족을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기미 정책을 실시하였다. 정복 지역의 우두머리를 도독에 임명하여 자치를 맡기고 중앙에서 도호부 를 설치하여 감독하도록 하였다. 이 정책은 당 제국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책봉·조공 체제를 통해 주변국과의 안정을 꾀하였다. 이러한 번영은 현종 때까지 이어졌다.

     당은 수의 제도를 계승하여 율령 체제로 국가를 운영하였다. 중앙에서는 3성 6부의 중심의 관제가 황제의 명령을 비롯한 각종 정책을 처리하였고, 지방은 주현제로 운영 하며 관리를 파견했다. 국가는 호적을 작성하고 이를 근거로 농민에게 일정량의 토지를 나누어 주는 균전제를 시행하였다. 균전을 지급받은 성인 남자는 국가에 조용조의 의무를 지고 군대에 동원되었다(부병제). 당은 균전제, 조용조, 부병제의 시행으로 군사력과 재정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체제는 동아시아 각국에 영향을 주었다.

 

 

 

 

 

당의 변천과 제도의 변화

     현종 대 강남에서 농업과 수공업이 발달하고 대외 무역이 발전하는 등 당의 번영이 절정에 달하여, 이 시기를 ‘개원의 치’라고 하였다. 그러나 절도사의 등장과 율령 체제의 붕괴로 당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당은 넓은 영토를 수비하기 위해 도호부 대신 절도사를 설치하고 용병의 모집과 훈련을 맡겼다. 덕분에 국방력은 강해졌으나 절도사 세력의 강화로 황제권이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외적으로 7세기에는 돌궐과 토번, 8세기에는 위구르가 당을 위협하였다. 이들과의 대립 속에서 당의 통치체제가 서서히 흐트러져갔다. 율령 체제의 붕괴는 균전제의 동요로부터 시작되었다. 현종 대 인구가 증가하면서 농민에게 나누어 줄 토지가 부족해지고 토지 사유화가 촉진되었다. 균전제의 붕괴로 농민들을 부병제로 징집하기 어려워지자 당은 모병제를 실시하여 직업 군인을 모집하였다. 이로 인해 군사비로 많은 재정을 지출할 수밖에 없었고 그 부담은 농민에게 전가되었다.

     현종 말년에 절도사인 안녹산과 그의 부하 사사명이 일으킨 반란(안사의 난, 755-763)은 당을 큰 혼란에 빠뜨렸다. 반란을 진압하면서 중앙 정부가 약화되었고, 지방에서는 절도사가 독자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또한 균전제가 붕괴되어 장원제로 바뀌 었고 부병제는 모병제로 전환되었다. 대다수 농민이 소작농으로 몰락하자 정부는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조용조를 대신하여 양세법을 시행하였다. 양세법은 각종 세금을 재산에 따라 차등을 두어 부과하되 여름과 가을에 징수한 제도로, 명 대에 일조편법이 시행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이러한 사회 변화 속에서 황소의 난(875)을 계기로 당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결국 절도사 주전충에 의해 멸망하였다(907). 이후 절도사들이 서로 나라를 세워 경쟁하면서 5대 10국의 분열기가 이어졌다.

 

 

 

 

 

당의  문화

     당은 귀족 중심의 사회였다. 귀족은 과거와 음서를 통해 관직을 독점하고 특권을 누렸다. 과거제에서는 최종 선발 과정에서 문벌이 중시되었다. 한편 당대에는 화북 지방에서도 2년 3모작이 가능해져 농업 생산이 크게 늘었다. 상업도 발달하여 일종의 약속 어음인 비전이 사용되었고, 상인 조합인 행도 나타났다.

     당은 초기부터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실시하여 7세기 중반 동서 교역로를 확보하였다. 사막길(비단길), 바닷길 등 교통로를 중심으로 아라비아, 페르시아 등지의 서역 상인들의 왕래가 활발하였고, 중국의 견직물, 도자기, 금은 세공 품이 세계로 수출되었다. 정부는 시박사를 설치하여 무역을 관리하였다. 당은 외국인에게 개방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수도 장안을 비롯한 대도시에는 각국에서 온 상인, 유학생, 유학승, 예능인이 모여들었고 서역 풍습도 유행하는 등 국제적인 문화가 발전하였다. 또한 조로아스터교(배화교), 마니교, 네스토리우스교(경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외래 종교가 들어오기도 하였으며, 이국적인 당삼채가 유행하였다.

     당 대의 불교는 선종, 정토종 등 새로운 종파가 유행하였으며, 국가의 지원을 받아 호국 불교의 성격이 강하였다. 동서 교역로의 발달에 힘입어 현장, 의정과 같은 불교 승려들이 서역과 인도를 여행하고 견문을 남겼으며, 불교 경전을 들여오기도 하였다. 위진 남북조 시대에 유행하였던 도교도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더욱 발전하였다.

     사회・경제적 발전은 문화에도 반영되었다. 문학에서는 귀족의 취향에 맞는 시가 발달하여 이백과 두보가 훌륭한 시를 남겼다. 그림에서는 왕유 가 산수화에 뛰어났으며, 글씨에서는 구양순이 이름을 날렸다. 과거제에 힘입어 유학도 발달하였는데, 훈고학을 집대성한 공영달의 경전 주석인 『오경정의』가 편찬되었다. 이는 과거 수험서로 쓰였으나 사상의 획일화를 초래하였다.

 

 

 

 

수・당 대에 발전한 동아시아 문화권

     한 대부터 나타난 동아시아의 공통된 문화 특징은 당과 주변 각국이 정치・군사 면에서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으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당은 6도호부를 설치하여 몽골, 서역, 베트남 등을 지배하였고, 신라, 발해, 일본 등은 교류를 통해 당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유고와 불교, 율령과 한자 등의 공통 문화 요소가 동아시아 각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한 대 이후 국가의 통치 원리로 자리 잡은 유교는 주변 여러 나라에 전파되어 동아시아 지역의 정치 이념이자 사회 규범으로 기능하였다. 유교는 정치적으로 황제와 국왕의 권한을 뒷받침하였으며, 사회적으로 사회 질서의 형성과 유지에 기여하였다. 불교는 위진 남북조 시대 이후 경전의 번역이 활발해지면서 점차 중국화 하였다. 중국화 한 불교는 주변국에 전파되어 동아시아 지역의 종교적 기반이 되었다. 각국에서는 사찰과 탑뿐만 아니라 불상과 석굴 사원의 건축이 활발하였다. 율령 체제는 당 대에 확립되어 주변국에 전파되었으며, 일찍부터 주변 여러 나라에 전해져 사용되었던 한자는 동아시아 지역의 공용 문자로 기능하였다.

 

수당대 동아시아 교류 지도
출처 - 금성출판사 고등학교 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