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체제의 해체
냉전의 완화
제3 세계의 비동맹 중립주의와 더불어 미국과 소련의 대립에서 벗어나 독자 노선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유럽 여러 나라가 미국과 소련에 대항하여 유럽 경제 공동체를 구성하였으며(1958), 프랑스가 미국 중심의 북대서양 조약 기구 통합군을 탈퇴하였다(1966). 중국은 사회주의 이념과 사회주의 진영 내의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 국경 문제로 소련과 분쟁을 겪었다.
전후 20년 이상 계속된 냉전 체제는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의 힘으로 한다는 원칙을 담은 미국의 닉슨 독트린(1969)으로 긴장 완화의 분위기로 전환되었다. 이후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철수하고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였다. 또한 소련과 전략 무기를 제한하는 협정(SALT)을 체결하였다(1972). 서독의 총리 빌리 브란트도 동방 정책을 내세워 동독과 교류하고, 국제 연합에 함께 가입하였다(1973). 이처럼 냉전 체제가 완화되자 이념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소련의 해체
냉전의 한 축을 형성하였던 소련은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의 등장으로 변화가 나타났다. 흐루쇼프는 스탈린 실정을 비판하고 서독과 국교를 회복하고 미국을 방문하는 등 자본주의 국가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평화 공존(데탕트)을 도모하였으나 보수파의 반발로 축출되었다. 이후 브레즈네프 집권 시기에 소련은 총체적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1970년대 석유 파동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고, 1980년대 들어 경제 성장 둔화, 공산당 관료 체제의 강화, 부정부패 등으로 국민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1985년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고르바초프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개혁)・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를 통해 기업의 이윤 추구 보장, 시장 경제 원리 도입, 언론 통제 완화, 정치 민주화 등을 추구하였으며,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불간섭 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는 공산당을 해체하였지만, 소련 체제 자체는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물길을 튼 개혁・개방은 소련 체제를 와해시키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소련의 경제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글라스노스트의 영향으로 소련 연방 내 각 공화국이 독립을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고르바초프를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한 옐친은 독립 국가 연합(CIS)을 출범시켜 소련을 공식 해체하였다(1991). 옐친은 러시아 대통령에 당선된 후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포기하고 급속히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로 전환하였다.
독일과 동유럽 사회의 변화
소련의 개혁개방을 계기로 서독의 풍요와 자유를 동경한 동독 주민의 개혁 요구에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동독 주민들은 서독으로 대거 탈출을 감행하였으며, 통일과 민주화를 요구하였다. 그 결과 동독에서 여행 자유화 정책이 발표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다. 이듬해 동독에서 첫 자유 총선거가 시행되어 서독과 통합을 약속한 정당이 승리하였다. 곧이어 통일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어 동독의 재편된 다섯 개 주가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통일이 이루어졌다(1990).
소련과 동독 외에 동유럽 각국에서도 개혁의 요구가 분출하였다. 폴란드에서는 자유 총선거에서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 노조가 승리하면서 비공산당 정권이 수립되었으며(1989), 같은 해 헝가리에서도 다당제가 도입되고 대통령제를 규정한 헌법이 마련되었다. 한편 루마니아에서는 민주화 운동을 억압한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처형당하기도 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바츨라프 하벨이 주도하는 '시민 광장'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이 전개되어 하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공산당 정권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티토를 중심으로 독자 노선을 걸었던 유고슬라비아에서는 티토의 사망 이후 민족주의가 대두하면서 각 공화국의 분리 독립 요구가 커졌다.
탈냉전 시대에 동유럽 각국에서는 민족주의가 거세게 분출하여 새로운 갈등과 분쟁이 발생하였다. 민주화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 공화국과 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분리되었다(1993). 유고슬라비아에서도 연방 내 각 공화국의 분리 독립 요구가 거세어졌다. 그리하여 1991년에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가 독립하였고, 이듬해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독립하여 사실상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해체되었다.
중국의 변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중국에서는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 간에 일어난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여 중화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었다(1949). 마오쩌둥은 은행과 각종 기업의 국유화, 농업과 상공업의 집단화, 토지 개혁 등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또한 흐루쇼프의 평화 공존 원칙에 반대하여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을 목표로 인민공사를 조직하고 대약진 운동을 전개하여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꾀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무리한 계획과 인민의 노동 의욕 저하, 연속되는 자연재해로 실패하였다.
이후 류사오치, 덩샤오핑 등의 실용주의 경제 정책이 추진되었으나, 마오쩌둥은 문화 대혁명(1966~1976)을 일으켜 실용주의 경제 정책을 추진하던 세력을 몰아낸 후 권력을 장악하였다. 어린 학생 조직인 홍위병을 앞세워 공산주의 원리에 위협이 되는 요소를 제거하고자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중국의 전통문화가 파괴되고 많은 예술인과 지식인이 억압을 받았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덩샤오핑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덩샤오핑은 문화 대혁명의 잘못을 인정하고 실사구시를 내세워 '흑묘백묘론'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였다. 동남 해안 지대에 경제특구를 설치하고 화교와 외국의 자본 및 기술을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중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개혁과 개방에 따른 급속한 경제 성장은 새로운 갈등을 낳았다. 빈부 격차가 커지고 공산당원과 관료의 부패에 대한 불만이 쌓여 정치 민주화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1989년 톈안먼 광장에 수천 명의 시위대가 모여 정치 민주화와 개혁을 요구하였으나, 중국 공산당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톈안먼 사건).
민주화 요구를 억누른 이후에도 중국의 경제 성장은 계속되었다. 풍부한 인력과 지하자원, 넓은 시장은 중국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제 사회에서 중국의 위상이 높아졌다. 이를 배경으로 영국과 포르투갈의 통치아래 있던 홍콩(1997)과 마카오(1999)를 반환받았으며, 2008년에는 베이징에서 하계 올림픽이 개최되었고, 2010년에는 국내 총생산에서 세계 2위를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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