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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세계사]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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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2차 세계 대전의 발발

     전체주의 체제를 추구한 이탈리아와 독일이 대외 팽창에 나서면서 유럽의 질서가 요동쳤다.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보호국으로 삼은 후 에티오피아를 정복하였다(1936). 국제 연맹이 이를 제재하자, 이탈리아는 국제 연맹을 탈퇴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독일도 국제 연맹을 탈퇴하고 비무장 지대인 라인란트를 침공하였다(1936).

     이탈리아와 독일은 에스파냐 내전에도 개입하여 독재 정부인 프랑코 세력을 후원하였다. 이로써 내전은 파시즘과 반파시즘 사이의 국제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독일과 이탈리아가 추축국 동맹을 체결하였고, 이후 독일과 일본이 맺은 방공 협정에 이탈리아까지 가입하면서(1937) 전체주의 세력은 3국 추축 진영을 형성하고 대외 침략을 본격화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영토 분할에 불만이 있었던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략하고(1935) 일본도 만주 사변에 이어 중일 전쟁을 일으켰다(1937).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강제로 합병한 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까지 요구하였다(1938). 독일을 이용하여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으려고 유화 정책을 피던 영국과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와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뮌헨 협정을 체결하여 더 이상의 영토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수데텐 지방을 독일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약속을 깨고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하고 폴란드 회랑 지대도 요구하였다. 영국과 프랑스가 이를 거절하자 독일은 그동안 이념적으로 대립하였던 소련과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폴란드를 기습 침공하였다(1939). 이에 폴란드와 원조 조약을 맺고 있었던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의 확대

     독일은 신속하게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로 진격하고 프랑스 파리를 점령하였다. 프랑스 남부에서는 페탱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독일에 협조적인 비시 정부가 들어섰고, 이에 반대하여 드골 장군은 망명지 영국에서 ‘자유 프랑스’를 결성하여 독일에 대한 저항을 지도하였다. 영국인들도 총리였던 처칠을 중심으로 단합하여 독일 공군의 공습을 물리쳤다.

     이탈리아와 독일은 프랑스 공방전에 참전한 뒤 그리스를 침공하였다. 이후 독일은 발칸반도를 점령하여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나아가 1941년에는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까지 침공하였다.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이 장기화되자 원유를 비롯한 지하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아시아 전체에서 서양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우며 동남아시아를 침략하였다. 이에 미국이 일본에 대해 석유와 전쟁 물자 수출 금지 등의 제재를 가하자 일본은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였다(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군이 괌,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를 점령하면서 전쟁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의 종결

     전쟁은 1942년부터 연합국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탈리아는 전세 악화와 비판 여론 속에서 무솔리니가 몰락한 뒤연합국에 항복하였다. 1944년 6월 연합국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성공시켜 파리를 회복하고 독일 본토로 진격하였다.

     1945년 5월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하자 독일군은 무조건 항복하였다. 아시아・태평양 전선에서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고 소련이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해 오자, 일본도 무조건 항복하였다(1945. 8.). 이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전후 처리와 국제 연합의 창설

     제2차 세계 대전은 5,000만 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남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었다. 곳곳에서 자행된 학살, 전후방이 따로 없는 무차별 공습과 폭격, 기아와 질병 등으로부터 비롯된 민간인 피해도 극심하였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엽합국 대표들은 카이로, 얄타, 포츠담 등지에서 회담을 열고, 전후 처리와 평화 유지 및 새로운 질서에 대해 논의하였다. 패전 후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으며, 일본은 미군의 지배를 받다가 샌프란시스코 조약(1951)을 통해 주권을 되찾았다.

     전쟁이 끝나고 독일 뉘른베르크와 일본 도쿄에서는 전쟁 범죄를 처리하기 위한 국제 군사 재판이 열렸다. 이를 통해 침략 전쟁 자체를 범죄로 규정하고, 전쟁 중 저질러진 비인도적 행위에 대해 처벌이 이루어졌다.

     한편 1941년 북대서양의 함상에서 만난 루스벨트와 처칠은 대서양 헌장을 공동으로 발표하여 국제 연합(UN) 창설을 결정하였다. 1945년 10월에 출범한 국제 연합은 평화와 안전 유지, 국제 우호 증진 등을 주요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안전 보장 이사회의 결의가 총회보다 우선시 되었으며, 미국・소련・영국・중국・프랑스의 5개 상임 이사국들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국제 연맹과는 달리 침략 국가에 대한 무력 개입이 가능하였으나, 국제 연합은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의 이해와 냉전 상황에 좌우되는 등 한계를 노출하기도 하였다.

 

얄타에 모인 3국 대표
출처 - MiraeN 고등학교 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