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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근대적 생활 방식의 확산

근대적 생활 방식의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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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생활 방식의 확산

 

서양적 생활 방식의 수용

     서양 문물이 확산되면서 생활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전통적인 옷과 머리 대신 서양식 복장과 단발을 하는 것이 개화의 상징이 되었다. 남성들은 양복을 입고 머리카락을 잘랐으며, 그 위에 모자를 썼다. 남성들이 단발은 때로 정부의 강요로 시행되어 저항을 받기도 하였다. 일부 여성들은 전통 복장 대신 양장을 하였으며, 머리도 단발하였다. 

 

 

근대적 시간관념의 확산

     전통 사회 사람들은 해가 뜨면 일어나 논밭을 갈고 해가 지면 들어와 잠을 자며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살았다. 그러나 개항 후 크고 작은 시계들이 서양문물과 함께 들어오면서 동아시아 사람들은 시와 분을 세밀하게 구분한 근대적 시간에 접하게 되었다. 일본은 1873년 태양력을 도입하였고, 조선에서는 을미개혁 이후 1896년부터, 중국에서는 중화민국이 수립된 1912년부터 태양력을 도입하여 사용하였다. 그리고 하루를 24시간, 일주일을 7일로 하는 전국 공통의 시간을 만들었다.

     동아시아 사람들이 기차를 이용하면서 근대적 시간에 맞추어 생활하는 경향이 점차 확산되었다. 열차의 출발·도착 시간을 분 단위로 표시한 기차 시간표를 보면서 시간을 분, 초까지 나누어 인식하게 되었다. 철도가 외진 마을까지 도달하게 되면서 철길 주변 마을 사람들은 지나가는 기차를 시간을 재는 수단으로 삼기도 하였다. 국가의 표준 시각에 따라 운행되는 철도의 영향으로 철길 주변의 지방 주민까지 시간관념을 갖게 되었다.

     학교도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학생들이 생활하도록 통제하여 근대적 시간관념의 확산에 영향을 끼쳤다. 학생들은 시간에 맞추어 등교하고 수업을 들었다. 학교 규칙과 교과서에 시간 개념을 강조하는 내용이 포함되었고 시간을 지키지 않는 학생에게는 벌을 주었다.

 

 

 

 

근대 도시의 형성

     개항으로 국제 무역과 금융이 확대되면서 근대 도시가 성장하였다. 개항 도시에는 외국인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었고, 전신·전화·우편·신문·전차 등 근대적 통신·교통 시설이 들어섰다. 그러나 외국인이 거주하는 조계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자국 거주민이 강제로 밀려나는 일도 발생하였다. 또한 일자리를 찾아 농촌에서 이주해 온 이들은 신문물을 누리지 못하고 도시의 빈민층으로 어렵게 생활하였다.

     청에서는 상하이, 톈진 등 개항 도시가 열강의 진출 마대가 되면서 상거래와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하였다. 개항 도시에는 서구 상품을 취급하는 상점과 외국 상관, 금융 기관이 집중적으로 들어서면서 인구도 급증하였다. 특히 상하이는 빠르게 발전하여 19세기 말에 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섰으며, 지식인과 언론인·출판인들이 대거 이주하여 활동하면서 경제·문화 중심지로도 부상하였다.

     일본은 미·일 수호 통상 조약에 따라 요코하마 등 항구를 추가로 개항하였다. 개항 도시들은 전국의 상인이 모이는 무역항으로 성장하였고 이곳을 통해 신문, 공원, 음식 등 서구 문화가 들어왔다. 한편 메이지 정부는 1872년 수도인 도쿄의 긴자에 대화재가 일어나자 긴자의 도로를 확장하고 벽돌 건축으로 서양식 거리를 만들었다. 

     조선에서는 일본에 의해 개항이 이루어지면서 부산, 인천 등 개항장에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었다. 그 후 각국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한성에 외국 공사관이 들어서고, 많은 외국인이 거주하게 되었다. 대한 제국 정부가 경운궁을 중심으로 황성 만들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한성도 점차 근대 도시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화로 한성은 경성으로 불리게 되었고, 도심에는 식민 통치를 상징하는 조선 총독부가 들어섰다. 

 

 

 

 

철도, 항로, 전신을 통한 연결망 구축

     철도는 상품 유통 촉진, 여행 문화 확산, 기술 발전 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여행을 통해 사람들의 활동 공간과 시야를 크게 확대하는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서구 열강이 동아시아에 철도를 부설한 이유는 그들의 군사 침략과 경제 침탈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중앙 집권을 강화하고 부국강병을 실현하기 위해 직접 철도 건설에 나섰다. 1872년에 일본 최초로 도쿄~요코하마 간 철도가 개통되어 도보로 10시간 걸리던 거리를 53분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철도의 이점이 알려지자 각 지역에서 철도 부설 유치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철도 국가라 불릴 만큼 철도 노선이 늘어났다. 

     청에서는 1876년에 처음 철도가 부설되었다. 처음에는 열강의 군사적·경제적 침략과 풍수 문제 등으로 반대가 많았지만, 철도 부설의 여부를 두고 찬반 논쟁을 벌인 끝에 1889년에 철도 부설을 기본 정책으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철도 기술을 배워 오도록 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고 철도 기술자 양성 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자본과 기술 부족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901년 신축 조약 체결을 계기로 중국 철도는 대부분 열강의 손으로 넘어갔다.

     대한 제국의 철도는 일본의 경제적·군사적 침탈에 이용되었다. 철도 용지 부근에 사는 주민들은 자신의 땅을 철도 용지로 헐값에 수용당하고 수시로 노동력과 식량 등을 제공해야 했다. 때문에 곳곳에서 일본의 강제 동원과 가혹 행위에 대한 저항이 빈번하게 일어나 의병들이 철도나 철도 공사장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철도와 마찬가지로 동아시아 각국을 연결할 수 있는 항로도 열렸다. 조선과 청, 일본의 개항장을 중심으로 기선을 이용한 정기 항로가 생겨났다. 전신은 동아시아 각국이 통신을 통해 신속하게 연락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주로 개항장과 주요 도시에 전신을 설치하였다. 1880년대 말에 이르러 동아시아에는 하루 만에 서로 통신할 수 있는 전신망이 갖추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