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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전후 처리

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전후 처리 

 

썸네일 - 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전후 처리
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전후 처리

 

연합국의 전후 처리 구상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우위를 차지한 연합국은 여러 차례 회담을 열어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였다. 1943년 미국·영국·중국의 수뇌부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 내기 위한 군사 행동을 지속하고 일본이 탈취·점령한 지역을 되돌려 준다는 내용을 담은 카이로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만주·타이완의 반환과 한국의 독립 등이 약속되었다. 1945년 2월에는 미국·영국·소련의 수뇌부가 얄타에서 회담을 열고 전후 독일의 처리 문제와 소련의 대일전 참전에 합의하였다. 5월에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하자, 미국·영국·중국·소련의 수뇌부는 포츠담 선언을 통해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카이로 선언의 이행을 강조하였다.

     일본은 이를 거부하였으나, 1945년 8월 초 일본 열도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고, 얄타 회담에 따라 소련이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며 만주와 한반도로 진입하였다. 이에 일본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하였다. 일본이 항복한 후, 한반도는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나뉘어 각각 미국과 소련의 군정이 시행되었다. 그리고 1948년 8월 남한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9월 북한에서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선포되어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연합국은 국제 평화와 안전 유지를 위한 국제기구의 필요성에 합의하였다. 그에 따라 발표한 대서양 헌장에 따라 1945년 10월 국제 연합(UN)이 출범하였다.

 

카이로 회담에 모인 미영중 정상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미국의 일본 단독 점령과 전후 개혁

     일본의 항복 이후 연합국은 미국이 중심이 되어 일본을 점령하고 일본의 비군사화·민주화를 목표로 군정을 실시하였다. 맥아더를 사령관으로 하는 연합군 최고 사령관 총사령부(GHQ)는 각종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일본의 군대를 해체하고 군국주의자를 공직에서 추방하였다. 그리고 국가 지도자의 전쟁 범죄를 심판하기 위해 도쿄 재판(극동 국제 군사 재판)을 열었다.

 

맥아더와 히로히토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이어서 연합군은 전후 개혁에 착수하였다. 정치 부문에서는 선거 나이를 20세로 낮추고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하였으며, 지방 자치제를 도입하였다. 경제 부문에서는 전쟁 중 군수 산업으로 큰 이익을 얻은 재벌을 해체하고 재벌의 부활을 막기 위한 법률을 제정하는 한편, 노동조합의 활동을 보장하였다.

     지주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농지 개혁을 단행한 결과 자작농이 많이 늘어났으며, 농업 생산성 향상을 통해 농가 소득을 늘려 내수 경기를 부양하는 데 성공하였다. 교육 부문에서는 전쟁을 미화하는 내용을 교과서에서 삭제하고, 중학교까지 의무 교육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개혁 과정에서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1946). 신헌법은 신격화되었던 천황을 ‘주권 재민, 평화주의, 인권 존중’을 기본 원칙으로 삼아 일본의 상징적인 존재로만 규정하였다. 그리고 국민 주권과 기본적 인권 보장, 군사력 보유 금지 등의 내용을 담았다. 특히 전쟁 포기를 명시하여 신헌법은 ‘평화 헌법’이라 불렸다.

신헌법
제1조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을 지닌 일본 국민의 총의에 근거한다.
제3조 천황의 국사에 관한 모든 행위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을 필요로 하며, 내각이 그 책임을 진다.
제9조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제 분쟁을 해결할 수단으로서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거한 위협 또는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그 외 전력을 보유하지 아니한다. 국가의 교전권을 인정하지 아니한다.
- 「일본국 헌법」, 19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