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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근대 지식의 확산

근대 지식의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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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지식의 확산

 

근대 학교의 보급

     외세의 압력으로 문호를 개방한 동아시아 각국은 부국강병을 이룩하기 위해 교육에 역점을 두었다. 이에 각국 정부는 전통 시대와 달리 교육의 기회균등 원리에 따라 모든 사람을 교육의 대상으로 삼았고, 서구의 근대 학문과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용적인 내용을 가르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각국은 서양 문물의 수용을 위해 외국어 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다. 청은 1862년 베이징에 동문관을 세웠다. 이를 모델로 조선은 1883년과 1886년에 각각 동문학과 육영 공원을 설립하였다. 일본에서는 게이오 의숙이 영어 교육을 담당하였다.

     근대 교육을 시행하기 위해 새로운 학교 제도도 마련되었다. 일본은 1872년 소학교-중학교-대학교로 연결되는 근대 학제를 공포하였다. 1890년에는 국민의 충성심과 효심이 국체의 정화이자 교육의 근원임을 규정한 ‘교육 칙어’를 발표하였다. 이후 소학교 교육을 의무 교육으로 하여 6세가 되면 소학교에 입학하여 서양식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그 후 교육 제도가 더욱 정비되면서 도쿄 제국 대학 등 고등 교육 기관 설립에도 힘을 기울였다.

     청과 조선도 일본의 근대 학제를 본뜬 근대 교육 제도의 틀을 갖추고 학교를 설립하였다. 조선에서는 근대 학제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도록 1895년에 ‘교육입국 조서’를 발표하여 충군애국의 교육 목표와 지덕체를 겸비한 교육을 강조하였다. 이후 소학교, 중학교로 이어지는 학제를 갖추었으며, 한성 사범학교를 설립해 교사를 양성하였다. 

     청에서는 신정이 시행되면서 과거제를 폐지하는 등 각종 교육 제도를 개혁하였다. 최고 교육 기관이었던 국자감을 대체하여 세운 경사 대학당은 과거제 폐지 이후 관리 양성 기능을 담당하였다. 청 정부는 1900년대 초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근대 교육 제도의 틀을 갖추었으며, 1909년에는 160만여 명이 근대 학교에 다닐 정도로 빠르게 근대 교육이 보급되었다. 그 밖에 외국인 선교사가 세운 학교도 근대 교육 확대에 이바지하였다.

     한편 각국 정부는 인재 양성을 위해 관비 유학생을 해외에 파견하였다. 자비로 해외에 나간 유학생도 많았다. 일본에서는 주로 미국,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고, 청과 대한 제국에서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해외 유학생은 귀국 후 근대화 정책의 추진과 근대 문물의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새로운 언론 매체의 발전

     근대 신문은 세상 소식을 전하고 국민을 계몽하여 여론을 주도하였다. 특히, 국민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자국어로 된 신문의 영향력은 컸다. 자국어로 창간된 신문과 잡지는 민권 관념을 보급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다양한 광고를 실어 소비자 확보에 영향을 끼치며 유행을 선도하였고 연재소설, 시사만화를 실어 독자를 끌어들였다. 각국 정부는 발행 허가제, 사전 검열제 등으로 신문을 통제하고 관리하였다.

     청과 일본에서는 조계지의 외국인이 정보를 교환하고 상호 소통하기 위해 신문을 발행하였다. 영국 상인이 『상하이 신보』를 발간한 이후 이를 모델로 중국어·일본어 신문이 창간되었다. 청 정부는 자국민의 신문 발행을 승인하지 않다가 20세기 초에 신문 발행을 허용하였다. 『시보』, 『대공보』 등 많은 신문이 발행되어 여론 형성을 이끌었다. 청 정부는 언론을 통제하고자 등록제와 검열제를 시행하였다. 하지만 신문 대부분은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계에서 발행되었다.

     일본에서는 1870년 최초의 일간지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이 발간되었다. 이후 여러 신문이 발행되었는데, 그중 반정부적인 성향을 보이는 신문은 정부의 압력으로 폐간되기도 하였다. 『요미우리 신문』은 일상을 다룬 흥미 위주의 기사를 실으면서 빠르게 성장하였다. 일본의 신문들은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당시 생생한 전쟁 상황을 보도하여 발행 부수를 크게 늘렸다. 하지만 주간지 『헤이민 신문』처럼 러・일 전쟁을 반대하며 평화를 주장하는 언론도 있었다. 

     조선에서는 1883년에 최초로 『한성순보』가 발간되었고, 1896년에는 민간 신문이자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이 발간되었다. 이 신문은 민중 계몽에 힘썼고, 정부의 개혁에 강한 압력을 행사하였으며, 열강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국권 수호를 위한 여론을 조성하였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는 민권과 국권 의식을 일깨우는 데 이바지하였다. 통감부는 신문지법을 제정하여 발행허가제와 검열을 구실로 언론을 탄압하였다. 

     한편 여러 단체·학회 등이 다양한 잡지를 발행하였다. 잡지는 신문과 함께 사회·문화 운동, 국민 계몽 운동의 중요한 도구였으며, 학문의 연구와 전파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결성된 일본의 민간 학술 단체 메이로쿠샤가 발행한 『메이로쿠(明六) 잡지』, 청의 저명한 출판사인 상무인서관이 창간한 『동방잡지』, 대한 제국의 애국 계몽 운동 단체들이 발행한 『기호흥학회 월보』, 『대한자강회월보』 등이 대표적이다.

 

 

 

 

여학교의 탄생과 여성 권리 의식의 신장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국민으로 키워야 한다며 여성 교육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정부와 민간에서 설립한 여학교는 여성 교육의 산실이었다.

     일본은 1872년 근대 학제 공포 후 여성도 초등·중등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청과 대한 제국의 여성 교육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여학교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점차 자국민이 세운 사립 학교가 늘었고, 정부도 여학교를 설립하면서 여성 교육이 확대되었다.

     여성은 여성 단체를 만들어 여성의 권익을 높이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일본에서는 부인 교풍회가 조직되어 여성을 억압하던 악습에 맞서 남녀가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일부다처와 매춘의 금지를 주장하는 운동을 전개하였고, 그 결과 중혼 금지가 법제화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대한 제국에서는 서울의 양반 부인들이 ‘여성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 직업을 가질 권리, 교육 받을 권리’를 주장하는 ‘여권통문’을 발표하였다(1898). 또한 찬양회를 조직하고 정부에 여학교 설립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일부 보수파의 반대로 학교 설립이 거부되자 회비를 거둬 직접 순성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중국에서는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악습인 전족을 거부하고 남성들과 함께 당당히 거리를 활보하는 분위기가 펴졌다. 특히 신해혁명 이후 여성의 권리 요구가 더욱 커졌으며, 신문화 운동 이후 전통적 가족 제도의 변화, 여성 교육과 인권 문제 등이 개혁 과제로 논의되었다. 이와 같이 여성 권리에 대한 인식이 성장하면서 각국에서는 낡은 관습에서 벗어나 자유연애와 결혼 등을 주장하는 ʻ신여성’이 등장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