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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냉전과 동아시아의 전쟁

냉전과 동아시아의 전쟁 

 

썸네일 - 냉전과 동아시아의 전쟁
냉전과 동아시아의 전쟁

 

냉전 체제의 형성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 체제와 이념을 달리하는 미국과 소련은 국제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미국과 소련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각 진영의 중심이 되어 체제와 이념을 둘러싸고 전개된 전후 국제 질서를 냉전 체제라고 한다. 냉전 시기 두 진영의 대립은 핵 군비 경쟁으로 이어졌다. 미국과 소련은 원자 폭탄보다 파괴력이 강한 수소 폭탄을 개발하고, 핵무기를 더 많이 보유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유럽에서 본격화된 냉전은 동아시아 정세에도 영향을 주었다. 미국과 소련은 한국과 중국에서 자기 진영에 유리한 정부가 수립되도록 각각 자본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을 지원하였다.

     미국은 중국의 국민당을 지원하는 한편, 일본이 전쟁을 다시는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는 동시에 소련을 봉쇄하여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화되자, 미국은 공산주의가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일 정책을 변경하여 일본을 동아시아의 반공 기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앞서 시행된 민주화 정책과 상반되는 법률을 제정하고, 과거 군국주의 세력을 정계에 복귀시켰다. 또한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재무장을 위해 자위대의 전신인 경찰 예비대를 창설하였다. 당시 일본의 신문들은 비군사화·민주화에 역행하는 이와 같은 움직임을 ‘역코스’라고 하였다.

 

 

 

 

중국의 국・공 내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협력하여 일본과 싸웠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다시 대립하였다. 내전 위기가 고조되자 이를 막기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 지도부가 평화 교섭을 벌였다. 미국은 평화 교섭을 중재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1946년 전면적인 내전이 발발하였다(국・공 내전, 1946. 7.).

     내전 초기에는 병력과 장비 면에서 우세한 국민당군이 전쟁을 주도하였다. 국민당군은 1947년 공산당 본부가 있던 옌안을 점령하고, 만주·화북의 주요 도시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내전이 길어지면서 재정 적자가 심해지고 통화가 남발되어 물가가 폭등하였다. 게다가 관료의 부정부패를 척결하지 못해 점차 민심을 잃어 갔다.

     반면에 공산당은 점령지에서 친일·악질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고 ‘경작자가 토지를 소유한다.’라는 원칙에 따라 토지 개혁을 시행하여 농민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었다. 또한 소련이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를 받아 공산당군의 화력을 강화하였다.

     1947년 중반 총반격에 나선 공산당군은 1949년 초 베이징을 장악하였다. 뒤이어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는 등 중국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였다. 마침내 공산당은 베이징에서 중화 인민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1949. 10. 1.). 내전에서 패한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이동하였다. 중국이 공산화되자, 미국은 중국에 대한 경제 봉쇄 정책을 취하고 일본의 반공 기지 역할을 강화하였다. 

 

중화 인민 공화국 수립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625 전쟁

     1948년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남북의 정치적·군사적 갈등이 점차 고조되고 동아시아를 둘러싼 냉전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소련이 핵 개발에 성공하고 중국에 사회주의 국가가 들어서자, 북한은 한반도 무력 통일을 위한 여건이 마련되었다고 판단하고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애치슨 라인 발표로 북한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미국이 참전할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하고, 소련·중국의 동의와 지원을 받아 1950년 6월 전면 남침을 감행하였다.

     전쟁 초기에는 북한이 우세하였으나 미국의 주도로 조직된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유엔군은 여세를 몰아 38도선을 돌파하였으나 중국군이 개입하여 북한을 지원하면서 양측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전선이 38도선 부근에서 교착되자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가 어렵다는 판단 아래 정전 협상을 시작하였고, 오랜 협상 끝에 1953년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한반도에서는 휴전선을 경계로 남북 분단이 굳어졌고, 남북 간의 이념 대결과 군비 경쟁이 심화하였다.

     한편 미국은 6·25 전쟁을 계기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이끌어 내고 미·일 안보 조약을 체결하였다. 뒤이어 한국 및 타이완과도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은 유엔군에 군수 물자를 공급하면서 경제 회복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미국의 승인 아래 무기 생산과 공급이 이루어짐으로써 재무장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중국은 6·25 전쟁 참전으로 타이완 통일의 기회를 잃었다. 그러나 전쟁을 구실 삼아 공산당에 불만을 가진 세력을 숙청하여 정치 통합의 기반을 다졌고, 사회주의 진영 안에서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6.25 전쟁의 전개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베트남 전쟁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호찌민은 하노이에서 공산주의 정부인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수립하였다(1945). 그러나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인정하는 소련·중국과 이를 인정하지 않는 프랑스·미국의 대립 관계가 심화하였다.

     1954년 프랑스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뒤이어 열린 제네바 회담으로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그리고 회담에 모인 나라들은 북위 17도선을 군사 분계선으로 삼아 베트남을 남과 북으로 분할하되, 2년 이내에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시행하자고 합의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부의 반공 정권은 총선거를 거부하고, 남베트남만의 단독 선거를 통해 베트남 공화국을 수립하였다(1955). 그러자 이에 반대하는 세력이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을 결성하여 게릴라전을 벌이며 저항하였고, 호찌민이 이끄는 북베트남 정부는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1965년 북베트남을 폭격하고 남베트남에 전투 부대를 파견하였다. 베트남 전쟁은 대규모의 국제전으로 전개 되었으며, 한국도 미국 동맹국의 일원으로 전투 부대를 파병하였다. 이에 맞서 중국과 북한, 소련이 북베트남을 지원하였다.

     1968년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이 미군에게 큰 타격을 주고자 대공세를 감행하였다. 미국도 많은 병력과 화력을 쏟아부었으나 북베트남이 격렬하게 저항함에 따라 전쟁은 장기화하였다. 더욱이 전쟁의 참혹함이 방송 등을 통해 알려지자 미국 내에서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반전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결국 반전 운동과 막대한 재정 부담, 인명 피해 등으로 궁지에 몰린 미국은 철군 방침을 정하여 파리 평화 협정(베트남 평화 협정)을 체결하였다(1973). 베트남 전쟁이 종결되면서 남북으로 갈라졌던 베트남은 통일되어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1976). 베트남 전쟁은 냉전의 대립 구조를 크게 변화시켰다. 반전 여론에 시달리던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고 베트남 전쟁을 조속히 마무리 짓기 위해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였고, 이후 양국 간에는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다. 

 

베트남 전쟁의 전개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