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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동아시아의 국교 회복

동아시아의 국교 회복 

 

썸네일 - 동아시아의 국교 회복
동아시아의 국교 회복

 

냉전과 동아시아 국제 관계

     동아시아의 전후 처리는 미국이 주도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체결을 통해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전쟁 책임과 피해국에 대한 배상 문제로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다. 또 중국, 한국 등의 피해국들은 회의에 참가하지 못하였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 국가들은 조양 서명을 거부하였다. 이에 동아시아 국가 간의 국교 회복은 여전히 미해결의 과제로 남았다. 

 

 

한국과 일본의 국교 수립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중화민국(타이완)과 일본이 화·일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가장 먼저 국교를 회복하였다(1952). 한국과 일본도 1952년부터 국교 수립을 위한 회담을 시작하였지만,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둘러싼 의견 차이로 회담은 계속 결렬되었다.

     1960년대 들어 미국은 한·일 수교를 강력히 촉구하였다.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되자,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북한, 소련, 중국에 대응하기 위한 한·미·일 삼각동맹의 구축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미국의 지지를 얻고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일본도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고, 한국과의 수교를 통해 수출 시장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국교 정상화 논의가 이루어지자 한국과 일본에서 강한 반발이 일어났다. 한국에서는 식민 지배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배상 없는 수교는 굴욕 외교라는 비판이 높았다. 일본에서는 한·미·일 삼국의 관계 강화가 결국 군사 동맹으로 이어져 평화 헌법을 위협할지 모른다고 우려하며 반대하였다. 이러한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양국 정부는 1965년 한·일 기본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국교를 수립하였다.

 

한 · 일 기본 조약(1965. 6. 22.)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 제국과 대일본 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 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제3조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연합 총회의 결의 제195(III)호에 명시된 바와 같이,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확인한다.
- 『한일 관계 자료집』 -

 

6.3 시위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