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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8・15 광복과 정부 수립 노력

8・15 광복과 정부 수립 노력 

광복 이후 국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속속 귀국하였다. 두 차례에 걸쳐 입국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은 귀국 환영식에서 큰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미군정은 한국인이 만든 행정 기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임시 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으며, 인민 위원회도 주체적으로 활동하기 어려웠다. 

 

썸네일 8・15 광복과 정부 수립 노력
8・15 광복과 정부 수립 노력

 

 

8・15 광복

     1945년 8월 15일, 일본 국왕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은 일제의 혹독한 탄압 아래에서도 부단히 펼쳐 온 한국인의 독립 노력을 국제 사회가 인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광복은 연합국이 승리한 결과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정부 수립은 미국과 소련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 사진
출처: 동아출판 고등학교 한국사

 

 

 

 

국토 분단

     얄타 회담 이후 소련은 일본에 선전 포고하고 1945년 8월 11일 한반도에 진주하였다. 이후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며 한반도 북부 지역을 점령해 나갔다. 미국은 소련의 한반도 단독 점령을 막기 위해 38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에 양국이 각각 군대를 진주시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자고 제안하였다. 소련이 이를 받아들이며 북위 38도선 이북은 소련군이, 이남 지역은 미군이 관할하게 되었다. 

     미군은 서울에 들어와 조선 총독의 항복을 받고 군정청을 설치하여 직접 남한을 통치하였다. 미군정은 현상을 유지하여 새로 수립될 정부에 권한을 넘겨주는데 중점을 두어 일제의 식민 통치 기구와 관료, 경찰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정부로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각 지역의 인민 위원회 등 자치 기구도 인정받지 못하였다.

     소련군은 각 지역에서 결성된 인민 위원회에 행정권을 이양하여 간접 통치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또한, 소련군과 함께 귀국한 공산주의자를 지원하여 소련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38도선 국토분할 사진
출처: 동아출판 고등학교 한국사

 

 

 

 

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

     광북 이후 정부 수립을 위해 가장 신속하게 움직인 지도자는 여운형이었다. 여운형은 안재홍 등과 함께 조선 건국 동맹을 기반으로 서울에서 좌우 세력을 연합하여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건준)를 조직하였다. 건준은 광복 직후 전국에 145개의 지부를 조직하고 치안대를 설치하여 질서를 유지하였고, 사회 안정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신량과 생활필수품 확보에 주력하여 국민 생활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리고 미군이 진주하였을 때 대등한 입장에서 교섭하기 위해 조선 인민 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고, 각 지부를 인민 위원회로 전환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좌익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자 우익 세력은 건준을 탈퇴하였다.

     광복 이후 주요 인사도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에 나섰다. 김성수와 송진우 등을 비롯한 지주・자본가 출신 인사들은 건준의 활동에 비판적인 우익 세력을 중심으로 한국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한국 민주당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지지를 선언하였으며, 미 군정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박헌영 등 좌익 계열은 조선 공산당을 기반으로 활동하였다. 국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도 귀국하였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지지 세력을 모아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를 조직하였다. 김구 등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은 미군정의 방침에 따라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여 한국 독립당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상태에서 한국인들의 정치・사회 활동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각 정치 세력들은 이념적 지향에 따라 정부 수립 방법, 친일파 청산, 토지 개혁 방식과 같은 주요 사안을 두고 서로 다른 입장을 보여 갈등을 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