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한국사

[한국사] 독립을 위한 노력

독립을 위한 노력 

1940년 9월, 중국 충칭에서 창설된 한국광복군에는 남성 대원뿐만 아니라 여성 대원도 있었다. 오광심, 조순옥, 김정숙, 지복영이 여성 대원으로 한국광복군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주로 총사령부의 비서 업무와 선전 사업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썸네일 독림을 위한 노력
독립을 위한 노력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통합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와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의 통합 회의가 결렬된 이후 김구의 한국 국민당, 민족 혁명당에서 이탈한 조소앙의 한국 독립당, 지청천의 조선 혁명당 등 민족주의 계열의 3개 정당은 독립운동의 역량을 모으기 위해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에 속한 3개 정당이 합당하여 한국 독립당을 결성하였다. 한국 독립당은 김구가 위원장을 맡았으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집권당 역할을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40년 9월에 충칭에 정착한 후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또한 이전의 집단 지도 체제에서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주석 중심의 단일 지도 체제를 마련하고 김구를 주석으로 선출하였다. 이로써 정당(한국 독립당), 정부(임시 정부), 군대(한국광복군)의 체제가 정비되고 인적 기반이 확대되면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위상화 역할은 커졌다.

     민족주의 세력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중심으로 집결하자, 사회주의 진영에서도 임시 정부로의 통합을 주장하는 의견이 나왔다. 중국 국민당 정부도 임시 정부로 단일화할 것을 권고하였고,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적극적인 대일 항전을 위해 민족 운동 세력의 결집이 요구되었다. 그러던 중 1942년에는 민족 혁명당 출신 김원봉 등이 합류하는 등 민족 혁명당과 다른 사회주의 계열 단체의 인사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합류하였다. 이로써 임시 정부는 중국 관내 독립운동을 아우르는 통합 세력으로 발전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화북의 조선 독립 동맹과도 통일 전선을 모색하였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한편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태평양 전쟁 직전인 1941년 일제 패망에 대비하여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발표하였다. 건국 강령은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기초하여 민주 공화정 수립, 토지 개혁, 대기업 국유화, 무상 교육 실시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8・15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제헌 헌법 제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국광복군의 독립 전쟁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일제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정규균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1940). 한국광복군은 지청천을 사령관을 하여 구성되었으며, 1941년에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일제에 대일 선전 성명서를 발표하고 한국광복군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독립 전쟁을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세계에 표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일 선전 포고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한국광복군에 지원을 시작하였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재정을 지원하는 대가로 ⌜한국광복군 행동 준승 9개 항⌟을 제시하여 중국 군사 위원회의 간섭을 받도록 하였다. 1942년에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 의용대의 본부가 합류하면서 전력이 크게 강화되었고, 이로써 중국 관내의 한인 무장 부대는 한국광복군으로 통합되었다. 1944년부터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중국 국민당 정부와 꾸준히 협상을 벌인 끝에 독자적인 작전권을 확보하게 되어 임시 정부의 위상이 높아졌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 광복군이 연합군과 합동 작전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43년 한국광복군은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미얀마・인도 전선에 공작대를 파견하여 영국군과 함께 공동 작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한국광복군은 대일 항전에서 직접 전투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일본군 포로 심문, 회유 방송 등 심리전을 펼쳐 큰 성과를 올렸다. 

     한편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를 우리 힘으로 몰아내 승전국의 지위를 얻기 위해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전략 정보국(OSS)의 지원을 받아 1945년 8월 20일에 국내 진공 작전(독수리 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예상 밖으로 일찍 항복하면서 국내 진공 작전은 취소되고 말았다.

 

 

 

 

국외 건국 준비 활동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41년 11월에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발표하여 일제로부터 독립을 달성한 이후에 세우고자 하는 국가의 이념과 체제를 밝혔다. 대한민국 건국 강령은 한국 독립당의 이념이었던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기초하였으며, 민주 공화정의 수립, 토지와 주요 산업의 국유화, 보통 선거의 실시, 무상 교육 실시 등의 내용을 담았다. 대한민국 건국 강령에는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포괄하고 있어 여러 정치 세력의 통일을 위한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후 임시 정부는 1944년에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개정・발표하여 국민의 기본권 보장과 삼권 분립 등의 내용을 명시하였다.

 

조선 독립 동맹

     1942년에 중국 화북 지역에서는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조선 독립 동맹이 결성되었다. 조선 독립 동맹은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주장하며 화북으로 이동해 있던 조선의용대 화북 지대를 조선 의용군으로 개편하고 조선 독립 동맹의 군사 조직으로 삼았다. 조선 의용군은 중국 공산당 팔로군 등과 함께 대일 항전을 벌였다.

     한편 조선 독립 동맹은 일제 패망에 대비하여 보통 선거에 의한 민주 공화국 수립, 남녀평등, 토지 분배, 의무 교육 실시 등의 내용을 담은 건국 강령을 발표하였다. 

 

 

 

 

 

재미 한족 연합 위원회

     미주 지역 한국인 동포들도 독립을 위해 힘을 하나로 모았다. 1941년 하와이에서 대한인 국민회 등 미주 지역의 9대 한국인 단체가 연합해 재미 한족 연합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재미 한족 연합 위원회는 모금 운동을 벌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재정적으로 후원하였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신분증을 발급하여 한국인을 보호하는 데 힘썼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한인 국방 경위대(맹호군)를 조직하여 무장 독립 전쟁을 준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도 한인 국방 경위대를 한국광복군의 일원으로 인정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협의하여 워싱턴에 외교 위원회를 설치하고 임시 정부가 미국의 승인을 얻도록 힘썼으나, 미국 정부의 외면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재미 한족 연합 위원회는 미국과 함께 냅코 작전을 계획하여 미국 내 한국인을 훈련하여 한반도에 침투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대원을 선발하고 훈련을 진행하였으나 일제의 항복 선언으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1940년대 주요 운동단체 지도
출처: 동아출판 고등학교 한국사

 

 

 

 

국내 건국 준비 활동

     국내에서는 여운형을 중심으로 국내의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대거 참여하여 1944년 비밀리에 조선 건국 동맹을 결성하였다. 조선 건국 동맹은 전국으로 조직을 확대하고, 농민 동맹을 조직하였으며, 징병・징용으로 끌려갈 사람들을 숨겨 주거나, 공출 반대 운동을 벌여 일제의 침략 전쟁을 방해하였다. 또한, 일본군의 후방 교란과 무장봉기를 목적으로 하는 군사 위원회를 만들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및 조선 독립 동맹과 연합 작전을 계획하는 등 항일 무장 단체와 연결하여 국내외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킬 계획을 세웠으나 일제의 패망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한편 조선 건국 동맹은 일제 타도를 위한 대동단결, 민주주의 원칙에 바탕을 둔 국가 건설 등을 목표로 하는 강령을 발표하였다. 

 

 

 

 

국제 사회의 한국 독립 약속

     제2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연합군이 승기를 잡자 1943년 11월 연합국은 전후 처리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독립이 최초로 논의된 것은 1943년에 열린 카이로 회담이었다. 

     연합국 정상은 태평양 전쟁에서의 승리를 확신하며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열었다. 이 회담에서 중국이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는 성명을 제안하자, 미국은 한국 국제 공동 신탁 통치안을 제시하였다. 연합국은 논의 끝에 '대일 전에 상호 협력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이 차지한 영토를 회수하며, 한국민의 노예 상태에 유념하여 적절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될 것을 결의'하는 내용을 포함한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1945년 이탈리아가 항복하고 독일의 패망이 임박하자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정상은 흑해 연안의 얄타에서 회담을 열었다. 이 회담에서는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국이 독일을 분할 점령한다는 원칙을 세웠고, 유럽에서 독일과의 전쟁이 끝난 뒤 2~3개월 내에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한다는 내용의 비밀 협정이 체결되었다. 또한, 패전국과 해방국에서 민주 세력에 의한 임시 정부의 구성, 자유선거 실시라는 원칙이 마련되었다.

     독일이 항복한 이후인 1945년 7월에는 연합국 대표가 포츠담에서 전후 독일 처리 문제와 일본과의 전쟁 방안을 논의하였다. 이 회담에서 연합국은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고, 카이로 선언의 모든 조항이 이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특히 일본의 주권이 4개 섬과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에 국한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한국의 독립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그러나 포츠담 선언 이후에도 일본이 전쟁을 계속하자, 미국은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였다. 소련도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와 한반도로 진격하였다. 이에 일본은 1945년 8월 15일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고,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이하였다. 

 

일본의 항복 문서 조인 사진
출처: 동아출판 고등학교 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