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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중국 관내에서 독립운동 전개

중국 관내에서 독립운동 전개 

1938년 창설된 조선 의용대는 중국 관내 최초의 한국인 무장 부대로, 창설 당시에는 200여 명으로 된 두 개의 부대였으나, 1940년에는 300여 명으로 늘었다. 당시 일제에 의해 강제 징집된 한국인 병사들은 부대를 탈출하여 조선 의용대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썸네일 중국 관내에서 독립운동 전개
중국 관내에서 독립운동 전개

 

한인 애국단의 활동

     국민대표 회의(1923)가 성과 없이 끝난 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더욱이 만보산 사건으로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정이 나빠지면서 중국 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졌다. 그러던 중 김구는 1931년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침체된 임시 정부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하였다. 

     한인 애국단원 이봉창은 1932년 1월 도쿄에서 일본 국왕이 타고 가는 마차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이봉창의 의거는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중국 신문이 이봉창의 의거 실패에 대해 아쉬워하는 기사를 보도하자, 일제는 이를 빌미로 중국 상하이를 침략하였다(상하이 사변).

     윤봉길은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국왕의 생일과 상하이 사변의 승리를 축하하는 기념식장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장군과 여러 고위 관리를 처단하였다(1932. 4.). 이 거사를 두고 중국의 장제스는 "중국의 100만 대군도 못한 일을 한국 용사가 단행하였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국의 독립운동에 냉담한 입장을 보이던 중국인들의 태도가 변화하였다. 이로써 한・중 연대의 항일 전선을 구축하는 결정적 계기가 마련되었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군관 학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설치하여 군 간부를 키워 낼 수 있도록 협조하였고, 중국 영토 내에서 한국인의 무장 독립 투쟁을 허락하여 임시 정부가 한국광복군을 조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민족 혁명당으로의 통합 운동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여 이전보다 심해진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겪은 독립운동 단체들은 대부분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다. 여러 독립운동가가 관내로 모이면서 독립운동의 방법과 사상 측면에서 갈등이 일어나 역량이 하나로 모이지 못하자, 통일된 항일 전선을 만들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그 결과 1935년에 난징에서 민족 혁명당이 창당되었다.

     민족 혁명당은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대부분을 합친 중국 관내 최대 규모의 민족 통일 전선 정당이었다. 하지만 김구 등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약화를 우려하여 참여하지 않았고, 또한 김원봉의 의열단 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지청천, 조소앙 등 민족주의 세력의 일부도 이탈하였다. 

     민족 혁명당은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민족 혁명당을 계승한 조선 민족 혁명당을 중심으로 통합에 찬성하는 단체들이 연합하여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을 결성하였다(1937).

 

 

 

 

한국 국민당 중심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인정과 지원을 받으며 활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이를 피해 상하이를 떠나 창사, 광저우 등 중국 각지를 거치게 되었다. 

     임시 정부의 해체에 반대한 김구는 민족 혁명당에 참여하지 않고 한국 국민당을 만들었다(1935). 한국 국민당은 민족 혁명당에서 탈당한 조소앙, 지청천 등 민족주의 세력과 연합을 도모하였고, 미주 지역의 대한인 국민회 등의 단체와 함께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를 결성하였다(1937). 이로써 중국 관내의 독립운동 세력은 민족주의 계열의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와 사회주의 계열의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의 두 갈래로 통일되었다. 이후 김구와 김원봉이 중심이 되어 두 진영의 통일을 위한 움직임이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이동로 지도
출처: 동아출판 고등학교 한국사

 

 

 

 

조선 의용대의 활동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은 1938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였다. 조선 혁명 군사 정치 간부 학교 졸업생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용대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대일 전선에 배치되어 정보 수집, 투항 권고, 포로 심문, 후방 교란 등 중국 군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며 많은 성과를 올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가 중국 국민당 지역에 대한 공세를 늦추고 국민당 또한 일제에 맞서기를 꺼렸다. 중국 국민당 정부가 항일 투쟁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조선의용대의 대부분은 보다 적극적인 항을 투쟁을 위해 중국 공산당 세력이 대일 항전을 펼치고 있던 화북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화북 지역에서 조선의용대 화북 지대를 결성하고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과 함께 호가장 전투와 반소탕전 등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는 이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 독립 동맹 산하 조선 의용군으로 재편되었다. 한편 조선 의용대원 가운데 화북으로 이동하지 않은 병력은 김원봉의 지휘 아래 1942년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