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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항일 연합 전선의 형성

만주에서의 항일 투쟁 

'동무야 잘 싸웠다 / 조선의 혁명군 / 총끝에 번갯불이 반짝거리어 / 악마의 왜놈들을 쳐부수던 밤 / 악마의 왜놈들을 쳐부수던 밤' 이 노래는 1930년대 조선 혁명군이 부르던 군가로, 일제에 맞선 조선 혁명군의 항일 투쟁의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양세봉이 이끈 조선 혁명군은 1929년에 결성되었으며 1930년대 이후부터는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썸네일 항일 연합 전선의 형성
항일 연합 전선의 형성

 

1930년대의 만주

     만주 지역은 지리적으로 소련과 가까워 일찍부터 사회주의가 전해졌다. 1920년대부터 우리 동포들은 사회주의를 이념으로 한 항일 단체를 만들어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 후반에 3부가 통합 운동을 벌인 결과 국민부와 혁신 의회로 재편되었다. 남만주 일대에서는 국민부가 조선 혁명당과 조선 혁명군을 만들어 활동하였고, 북만주 일대에서는 혁신 의회의 해체 이후 조직된 한국 독립당과 한국 독립군이 활동하였다.

     1930년대에는 만주로 이주한 한국인이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동한 독립운동가들과 일제의 수탈을 피해 건너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당시 만주는 대공황의 영향을 받아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일제가 1931년에 조작한 만보산 사건으로 한국인과 중국인이 서로 배척하기도 하였다. 

 

 

 

 

한중 연합 작전의 전개

     1931년 일제는 만주를 침략하고, 이듬해 만주국을 세우면서 만주 일대는 사실상 일제의 점령 지역이 되었다. 일제의 침략으로 중국 내 항일 감정이 높아졌고, 각지에서 일본에 대항한 봉기가 일어났다. 독립군은 이들 중국인 부대와 연합하여 무장 투쟁을 펼쳤다.

     남만주에서는 조선 혁명당이 조선 혁명군을 편성하였다.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함께 영릉가와 흥경성 일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북만주 지역에서 활약하던 한국 독립당은 일제의 만주 침략 직후 항일 무장 투쟁을 결의하고 한국 독립군을 결성하였다. 한국 독립군은 지청천의 지휘 아래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와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하지만 일제가 만주를 장악하고 계속해서 공격해 오자 독립군의 활동은 점점 어려워졌다. 이에 지청천 등 한국 독립군의 상당수는 만주를 떠나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다.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 혁명군은 양세봉이 일제의 밀정에게 살해당한 뒤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으나 1930년대 후반까지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는 동북 항일 연군에 가담하였다. 지청천을 비롯한 한국 독립군의 일부는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합류하였고, 한국광복군을 만드는 데 참여하였다. 

 

만주지역 무장투쟁 지도
출처: 동아출판 고등학교 한국사

 

 

 

 

 

만주에서의 항일 유격 투쟁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중국 공산당은 이에 맞서 항일 무장 투쟁을 주도하였다. 만주에 거주하던 한국인 사회주의 세력도 여기에 호응하여 항일 유격대를 조직하였고, 중국 사회주의 세력과 힘을 모아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만주 지역의 곳곳에 만들어진 항일 유격대를 통합하여 동북 인민 혁명군을 조직하였다(1933). 이후 동북 인민 혁명군은 민족과 노선에 관계없이 반일 통일 전선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동북 항일 연군이 조직되었다(1936).

     동북 항일 연군의 한인 유격대는 함경도 일대의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까지 통합하여 조국 광복회를 조직하였고 국내에 들어와 국내 민족 운동가들과 함께 함경남대 일대를 습격하여 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 등 일제의 행정 기관을 공격하였다. 이 사건이 국내 신문에 보도되면서 만주 지역에서 항일 무장 토쟁이 계속되고 있음이 알려졌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일제의 공격으로 타격을 입은 동북 항일 연군은 만주 지역에서 군사 활동이 어려워지자, 남은 부대는 대부분 소련의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이후에도 이들 세력은 만주 지역에 소규모의 부대를 파견하여 유격 활동을 계속하였다. 일부 한인 유격대는 광복 이후 소련군을 따라 국내에 들어와 북한 정권을 세우는 핵심 세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