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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세계사] 진・한 제국의 성립

진・한 제국의 성립 

 

썸네일 진한제국의 성립
진・한 제국의 성립

 

진의 중국 통일

     500여 년에 걸친 춘추 전국 시대의 분열은 진(秦)에 의해 통일되었다. 진은 서쪽 변방에 위치하였지만, 기원전 4세기경에 법가인 상앙을 등용하여 적극적인 부국강병책을 추진하면서 전국 시대 7웅 가운데 하나로 발돋움하였다. 이후 진은 나머지 여섯 나라를 정복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수립하였다(기원전 221).

     통일 후 진(秦) 왕 정은 왕의 칭호를 ‘황제’로 바꾸고 자신을 스스로 첫 번째 황제라는 뜻의 ‘시황제(始皇帝)’라고 칭하였다. 진시황은 전국을 36개의 군으로 나누어 각 군에 직접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리는 군현제를 실시하고, 수도와 지방을 잇는 도로망을 건설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그는 오랜 분열기를 거친 사회를 통합하기 위해 화폐·도량형·문자·수레바퀴의 폭 등을 통일하였으며,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여 법가 이외의 사상을 탄압하고 사상의 통일을 꾀하였다.

     국가 체제를 정비한 진은 북으로는 유목 민족인 흉노를 밀어내고 만리장성을 쌓았으며, 활발한 정복 활동을 통해 남쪽으로는 베트남 북부까지 영토를 넓혔다. 이때 확보한 영토는 이후 중국 영토의 원형이 되었다.

     그러나 진은 법가 사상에 따른 가혹한 형벌 집행과 만리장성, 병마용 갱, 아방궁 등의 대규모 토목 공사는 백성에게 과중한 부담과 희생을 요구한 것이기에 백성의 반발을 샀다. 결국 진시황 사후 진승·오광의 난을 비롯한 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나 진은 결국 멸망하였다(기원전 206).

 

 

 

 

 

 

진나라 지도
출처 - 금성 고등학교 세계사

 

 

한의 성립과 발전

     진 멸망 후 항우를 물리치고 한(漢)을 세운 유방(劉邦 고조)은 중국을 재통일하였다(기원전 202). 고조는 수도를 장안(시안)으로 정하고 군현제와 봉건제를 절충한 군국제를 시행하여 전국을 안정시키려 하였으며, 북방의 흉노에게 물자를 제공하고 평화를 유지하였다. 이후 무제 때 제후 세력을 제압하고 군현제를 전국적으로 시행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였다.

     무제는 동중서의 건의를 수용하여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채택하고 황제 중심의 정치 체제를 확립하였다. 무제는 영토 확장에도 힘을 쏟아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남월(남비엣)과 고조선을 멸망시켰다. 북으로는 공물을 주고 화친을 유지하였던 흉노를 공격하고 서역의 대월지에 장건을 파견하여 흉노를 저지할 동맹군을 얻으려 하였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였지만, 사막길(비단길)이 개척되어 교통로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무제는 잦은 대외 원정으로 재정이 어려워지자 소금과 철의 전매제를 시행하여 재정을 확충하고, 균수법과 평준법을 실시하여 물가를 조절하였다. 또한 오수전을 주조하여 전국에 유통하였다 무제가 죽은 후 외척과 환관의 권력 투쟁으로 쇠퇴한 한(전한前漢)은 외척 왕망에 의해 멸망하였다. 왕망은 신(新) 왕조를 세우고(8) 토지의 국유화, 노비 매매금지 등 급진적인 개혁을 실시하였으나 호족들의 반발로 무너졌다(23).

     전한의 왕족인 유수(광무제)가 호족의 지원으로 한을 다시 세우고(25) 뤄양에 도읍을 정하였다(후한). 광무제는 한 왕조의 부흥을 꾀하고 농민의 부담을 줄여주는 조세 정책을 폈으며, 유교를 장려하였다. 그러나 후한 말기 환관과 외척의 발호에 정치가 문란해지고 호족의 대토지 소유로 생활이 어려워진 농민들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결국 황건적의 난(184)을 계기로 멸망하였다(220). 후한은 위, 촉, 오의 삼국으로 분열되었다.

 

 

 

 

 

 

한나라 지도
출처 - 금성 고등학교 세계사

 

한의 사회와 문화

     한 대에는 철제 농기구가 전국적으로 보급되고 농업 기술이 발달하여 농업 생산력이 매우 증가하였다. 그러나 토지 사유화의 진전으로 빈부 격차가 심해지면서 지방의 유력 세력인 호족이 등장하였다. 호족은 토지를 잃고 떠도는 농민을 예속민으로 삼아 대토지를 경영하여 지역 사회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고, 향거리선제를 통해 관료로 진출하여 중앙 정치를 주도하였다. 정부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법령을 공포하고 중농 억상책을 시행하였으나 호족의 성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한 대에는 춘추 전국 시대 이래의 문화가 종합되어 중국 전통문화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특히 유가 사상은 다른 학파의 사상을 수용하여 황제와 국가 권력을 옹호하기 위한 현실적 이념인 유교로 발전하였다. 무제는 이를 이용하여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였고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유교의 화이사상을 적용하여, 중국을 황제국, 주변국을 제후국으로 설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책봉 및 조공 관계를 성립시켰다. 또한 무제는 오경박사를 두고 교육 기관인 태학을 세워 유교를 보급하였고,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이들을 관리로 선발하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한 대의 유학은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없어진 유교 경전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경전을 풀이하고 주석을 달고 해석을 중시하는 훈고학이 주된 흐름으로 정착되었다. 또한 민간에서는 신비주의적 토착 신앙이 퍼지면서 도가 사상과 결합하여 태평도, 오두미도와 같은 민간 신앙으로 발전하였다. 후한 대에는 사막길을 따라 서역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었으나,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하였다.

     역사학에서는 개인의 전기를 이어가는 것을 중심으로 역사서를 구성하는 기전체 방식의 사서가 등장하였는데, 전한 때 사마천이 『사기』를 내놓았고, 후한 때 반고가 그 체제를 본받아 전한의 역사를 정리해 저술한 『한서』가 대표적인 사서이다. 이는 이후 중국 정사 서술의 모범이 되었다. 후한에서는 채윤이 개량한 제지술로 종이가 널리 보급되었고, 이를 배경으로 학문과 사상의 발달이 촉진되었다.

     이처럼 한은 400년 넘게 통일 제국을 유지하면서 춘추 전국 시대 이래 발전한 문화를 융합하여 중국 문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오늘날 한자(漢字), 한족(漢族)과 같이 중국을 지칭하는 ‘한(漢)’이라는 글자는 모두 한에서 유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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