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명
중국 문명의 탄생
중국의 황허강 유역은 비옥한 황토로 덮여 있어 농경에 유리하였다. 기원전 8000 ~ 기원전 6000년경에 신석기 문화가 시작되었다. 이후 황허강 일대를 비롯하여 만주 서부, 창장강 유역에서도 신석기 문화가 발달하였다. 각 지역에서는 채색 토기인 채도, 흑도 등 다양한 토기와 도구가 사용되었다.
신석기시대 말부터 황허강 중하류의 황토 지대를 중심으로 기원전 2500년경 청동기와 문자를 사용하며 성을 쌓고 정치 조직을 갖춘 초기 국가가 나타났다. 중국 기록상에 나타난 최초의 왕조인 하(夏) 왕조는 이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하는 그동안 전설로만 여겨졌으나 황허강 중류의 허난성에서 얼리터우 유적이 발굴되면서 그 존재가 밝혀지고 있다.
실재한 것으로 확인된 중국 최초의 왕조인 상(商) 왕조는 기원전 1600년경부터 황허강 중류에서 등장한 도시 국가 연맹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를 멸망시키고 은허를 중심으로 황허강 일대를 통치하였다. 상은 제정일치의 신정 국가로, 국가의 중요한 일은 정인이라는 점술가가 점을 쳐서 신의 뜻을 물어 국사를 결정하는 신권 정치를 펼쳤다. 점의 내용과 결과는 갑골에 새겨 기록하였는데, 이것이 한자의 원형이 되었다.
청동으로 된 무기와 제사 도구를 만들고, 돌과 나무로 농기구를 제작하였다. 수도 은허의 유적에서는 정교한 청동기 유물이 대거 출토되었다. 또한 태음력을 제작하여 제사와 농경에 이용하였다. 상은 지배층인 귀족과 피지배층인 평민과 노예로 구성되었으며, 평민은 대개 농민으로 국가에 공물과 요역의 의무를 졌다. 또 왕이 죽으면 많은 사람을 같이 매장하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주의 발전
상의 서쪽, 웨이수이강 유역에서 출현하여 기원전 1100년경 상을 멸망시킨 주(周)는 호경(현재의 시안)에 도읍하고 황허 유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창장강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한 주는 넓어진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왕은 도읍과 직할지를 직접 다스리고 나머지 지역은 일족과 공신들을 제후로 봉하여 다스리게 하는 봉건제를 시행하였다. 이에 따라 제후는 분봉받은 토지에서 왕과 같은 통치권을 행사하는 대신, 왕에게 공납의 의무와 군사적 의무를 지게 되었다. 이러한 통치권은 대부분 세습되었다. 때때로 주 왕실은 감관을 파견하여 제후국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주의 봉건제는 종법제와 천명사상으로 뒷받침되었다. 혈연에 기초한 종법제는 직계 적장자를 중심으로 한 친족 사이의 규범으로, 봉건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천명사상은 왕이 하늘의 명으로 천하를 다스린다는 사상으로, 정복 전쟁을 합리화하고 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나아가 덕이 있는 자가 천명을 받아 나라를 다스린다는 덕치주의가 강조되어 도덕과 학문에 의한 정치 체제가 발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주의 천명사상과 덕치주의는 정전제와 함께 이상적인 통치 방식으로 인식되어 이후 중국 왕조의 기본적인 통치 이념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왕과 제후의 혈연관계가 멀어지면서 제후는 점차 왕의 통제에서 벗어났고, 그에 따라 주 왕실의 권위도 약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는 견융족의 침입을 받아 왕이 살해되고, 뤄양으로 천도하여 동주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수도가 서쪽에 있었을 때를 서주, 동쪽으로 옮긴 뒤를 동주라고 한다. 동주시대에는 주왕실은 권위를 상실하고 제후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면서 봉건제가 사실상 무너지고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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