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세계사

[세계사] 이슬람 세계의 팽창

이슬람 세계의 팽창 

 

썸네일 이슬람 세계의 팽창
이슬람 세계의 팽창

 

셀주크 튀르크의 발전

     9세기 중엽부터 많은 튀르크계 민족이 중앙아시아에서 서아시아로 이주하여 아바스 왕조의 친위대와 이슬람 지방 정권의 군대에서 활약하였다. 10세기 중엽 중앙아시아에서는 튀르크인이 세운 카라한 왕조가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세력을 넓히면서 튀르크인이 이슬람 세계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 10세기 중반에는 족장 셀주크가 이끄는 튀르크(셀주크 튀르크)가 카스피해 부근에서 일어나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세력을 확대하였다. 11세기에는 부와이 왕조를 무너뜨리고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칼리프를 보호하였다. 이에 아바스 왕조로부터 정치적 지배자를 뜻하는 ‘술탄’이라는 칭호와 정치적 실권을 위임받았다.

     셀주크 튀르크는 이란 지역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파미르고원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또한 상업과 학문을 장려하여 이슬람 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이후 예루살렘을 비롯한 소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비잔티움 제국과 대립하였는데, 이는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는 빌미가 되었다. 장기간 계속된 십자군 전쟁으로 셀주크 튀르크는 약화하였고,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까지 겹쳐 결국 분열되고 말았다. 셀주크 튀르크의 보호를 받던 아바스 왕조는 그 후에도 명맥을 유지하다가 홀라구의 몽골군에게 멸망하였다(1258).

 

셀주크 튀르크 지도
출처 - MiraeN 고등학교 세계사

 

 

 

 

티무르 왕조의 발전

     14세기 후반에 칭기즈 칸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티무르가 몽골 제국의 재건을 내걸고 중앙아시아의 여러 유목 집단을 통합하여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하는 티무르 왕조를 세웠다(1370). 그는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는 등 정복 활동을 통해 인도의 서북부에서 지중해 연안까지 이어지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티무르가 명을 정복하러 가던 도중에 병사하자 후계자 분쟁이 일어나 세력이 점차약화되다가 튀르크계 우즈베크인에 의해 멸망하였다(1507). 한편, 티무르의 후손 바부르는 인도에 무굴 제국을 세웠다.

     티무르 왕조는 유럽과 이슬람 세계, 중국을 연결하는 동서 무역을 독점하여 번영하였으며, 특히 수도 사마르칸트는 중앙아시아의 중심 도시로 발전하였다. 티무르 왕조의 문화는 이슬람・페르시아・튀르크・중국 문화가 혼합된 복합 문화였다. 문학에서는 페르시아어와 튀르크어로 쓰인 작품이 나왔고, 미술에서는 페르시아와 튀르크에서 발달한 세밀화가 이어졌다. 천문학도 크게 발달하였다. 이러한 문화는 이슬람 세계에 널리 영향을 미치면서 동서 문화의 융합과 이슬람 문화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티무르 왕조와 사파비 왕조의 발전 지도
출처 - 금성출판사 고등학교 세계사

 

 

 

 

사파비 왕조의 발전

     티무르 왕조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여러 세력이 대립하던 중 16세기 초에 이란 지역에서 이스마일 1세가 사파비 왕조를 세웠다(1501). 사파비 왕조는 고대 이래 페르시아의 군주 칭호인 ‘샤’를 사용하는 등 페르시아인 민족의식 부흥에 힘썼다. 시아파 이슬람교를 국교로 삼고 주변의 무굴 제국이나 수니파인 오스만 제국 등과 대립하였다.

     사파비 왕조의 전성기를 이룩한 아바스 1세는 수도를 이스파한으로 옮기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경제 부흥을 위해 많은 수익을 남기는 비단 산업을 국영 산업으로 전환하는 등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고, 각지에 도로, 다리, 상인들의 숙소를 건설하였으며, 오스만 제국에 빼앗긴 바그다드를 되찾아 영토를 넓혔다. 그러나 이슬람 법학자인 울라마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그들과 잦은 총돌이 일어났다. 사파비 왕조는 17세기말 왕실 내부의 갈등과 혼란, 부족들의 반란과 아프간족의 침입 등으로 점차 쇠퇴하다가 멸망하였다(1736).

 

 

 

 

오스만 제국의 성립과 발전

     서아시아 세계의 맹주로 불렸던 셀주크 튀르크가 몽골의 침입으로 무너진 뒤 튀르크 계통의 오스만족이 소아시아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국가를 수립하였다(1299). 오스만 제국은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해 짧은 시간에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소아시아 대부분을 빼앗았으며, 14세기 말에는 헝가리가 이끄는 크리스트교 연합군을 격파하여 발칸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술탄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15세기 초 티무르 왕조와의 게앙카라 전투에서 패하여 타격을 받았지만, 곧 체제를 정비하였다.

     메흐메트 2세는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키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여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1453). 이 도시는 이스탄불로 불리었다. 메흐메트 2세는 대대적인 도시 복원 사업에 착수했고, 법령을 제정하여 조세 제도를 정비하는 등 안정된 제국 경영과 경제 발전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이후 셀림 1세 때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북아프리카까지 진출하여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세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때 맘루크 왕조가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교의 성지 메카와 메디나의 보호권을 장악하고,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칼리프의 칭호까지 획득하여 수니파 이슬람 세계의 최고 지배자로 군림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술레이만 1세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헝가리를 정복하고 오스트리아의 빈을 포위 공격하였으며, 유럽의 연합 함대를 무찔러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나아가 홍해와 아라비아해 연안까지 차지하여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지중해 교역의 중심지로 여러 지역의 다양한 물자와 문물이 흘러들어와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다양성을 누렸다. 그뿐만 아니라 법전을 편찬하고 이를 바탕으로 오스만 제국의 정부 조직과 행정 제도를 정비하는 등 제국의 힘과 부를 증대시켰다.

     새로운 항로가 이용되어 지중해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레판토 해전(1571)에서 패배하는 상황에서도 오스만 제국은 여전히 우세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유럽에 공세를 퍼부었다. 그러나 17세기 말에 제2차 빈 포위가 실패하고 헝가리를 상실하면서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왕조의 영역 지도
출처 - MiraeN 고등학교 세계사

 

 

 

오스만 제국의 사회와 문화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와 발칸반도 북부 등 새로 획득한 영토의 통치를 총독이나 현지 지배자에게 위임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지역은 술탄이 관료와 군대를 바탕으로 한 중앙 집권적 통치 기구를 통해 직접 지배하였다. 술탄의 직할지에서는 토지 조사가 이루어졌고, 티마르 제도가 시행되었다. 티마르를 받은 기병과 데브시르메 제도에 의해 징집된 예니체리 군단은 오스만 제국의 팽창에 크게 기여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제국 내의 이교도들에게 이슬람교를 강제하지 않았다. 인두세만 내면 신앙을 인정하여 지역마다 종교별・언어별로 공동체를 만들어 자치를 누리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오스만 제국에서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할 수 있었다. 이들 공동체는 각 종교 공동체의 중앙 집권화가 진행되면서 밀레트 제도로 발전하였다.

     동서 교역의 요충지에 위치한 오스만 제국에는 동아시아, 인도, 아라비아 각지에서 교역을 위해 찾아오는 각국의 상인과 물자들로 넘쳐났다. 제국 곳곳에 상업도시가 생겨났으며, 이스탄불은 유라시아 교역망의 중심지로 번성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문화는 이슬람 문화의 바탕 위에 비잔티움 문화, 이란 문화, 튀르크 문화 등 동서 문화가 융합되어 발전하였다. 건축에서는 비잔티움 양식을 도입한 모스크가 건축되었고, 문학과 미술에서도 페르시아 전통을 이어받았다. 천문학, 수학, 지리학 등 실용적인 학문도 발달하여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에 걸쳐 문화의 황금기를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