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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세계사] 로마의 발전과 문화

로마의 발전과 문화 

 

썸네일 로마의 발전과 문화
로마의 발전과 문화

 

로마 공화정의 성립

     기원전 8세기 중엽에 라틴인은 이탈리아 중부에 도시 국가 로마를 건설하였다. 처음에는 에트루리아 출신 왕의 지배를 받는 왕정이었으나, 기원전 6세기말에 귀족들이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로마의 공화정은 귀족으로 구성된 자문 기관인 원로원과 행정과 군사를 담당하는 2명의 집정관, 그리고 시민이 모여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민회가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었다.

     공화정 초기에는 귀족이 권력을 독점하였으나, 상공업의 발달로 부유해진 평민들이 중무장 보병으로 군대의 주력이 되면서 자신들의 군사적 역할이 커지자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였다. 당시 전쟁을 치르기 위해 군사력이 필요했던 로마 귀족들은 평민의 요구를 받아들여 호민관직과 평민회를 설치하였다. 이어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이 제정되었다. 또한 리키니우스법으로 집정관 2인 중 1인은 평민 중에서 선출되었고, 호르텐시투스 법으로 평민회의 의결 사항이 원로원의 동의 없이 법적 효력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기원전 3세기에 로마 공화정에서 평민은 법률상 귀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로마의 팽창과 위기

     로마는 정치적 안정 속에서 대외 팽창 정책을 추진하여 기원전 3세기 전반에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였다. 이후 서부 지중해 일대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카르타고와 충돌하여 세 차례에 걸쳐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기원전 146)이 일어났다. 로마는 카르타고 장군 한니발의 공격으로 한때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스키피오의 활약으로 이를 극복하고 전쟁에서 승리하여 서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정복하고 오늘날의 터키 일부 지역까지 세력을 확대하는 등 지중해 대부분을 지배하게 된 로마는 새 정복지를 속주로 삼고 총독을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포에니 전쟁 지도
출처 - MiraeN 고등학교 세계사

 

     그러나 대외 팽창으로 사회 내부에 큰 변화가 발생하였다. 유력자들이 오랜 전쟁으로 방치된 농지를 독차지하고 노예 노동을 이용한 대농장(라티푼디움)을 경영하였다. 반면 중소 자영 농민층은 토지를 잃고 몰락하여 빈민 이 되었고, 이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로마는 사회 불안이 조성되었다.

     기원전 2세기 후반 호민관이 된 그라쿠스 형제는 이러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혁을 추진하였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농지법을 통해 유력자의 대토지 소유를 제한하고 농민에게 토지를 재분배하고자 하였으며,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 스는 곡물법을 통해 빈민들에게 곡물을 싼 가격으로 분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은 귀족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후 로마는 귀족파와 평민파 사이의 권력 투쟁으로 내전에 휩싸였고, 스파르타쿠스가 주도한 노예 반란까지 겹쳐 큰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농민층을 사병으로 거느린 군인 정치가가 등장하여 정치를 주도하는 삼두 정치가 실시되었다. 갈리아를 정복하고 세력을 키워 1차 삼두 정치를 주도하며 정권을 장악한 카이사르는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공화정이 붕괴될 것을 우려한 반대파가 그를 암살하였다. 이후 2차 삼두 정치를 이끌던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연합한 안토니우스의 군대를 악티움 해전(기원전 31)에서 격파하여 로마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로마 제국의 성립과 변화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군대와 재정을 장악하고 혼란을 수습하였다. 이에 원로원은 그를 ‘존엄한 자’라는 의미의 아우구스투스라고 칭하였다. 이때부터 옥타비아누스는 실질적인 황제가 되었고 로마의 제정이 시작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반대파를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을 ‘프린켑스(제1 시민)’로 불렀고, 공화정의 여러 제도를 유지하거나 부활시켰다. 옥타비아누스는 군대와 조세 개편 등 내정을 정비하고 변방의 수비를 견고히 하여 제국 번영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군 지휘권과 주요 관직을 독차지하여 황제와 다름없는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렇게 하여 로마 공화정이 끝나고 사실상 로마 제정이 시작되었다. 이후 1세기말부터 유능한 다섯 황제(5 현제)가 연달아 집권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정치적· 경제적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 옥타비아누스부터 5 현제까지의 약 200년간을 ‘로마의 평화 시대(Pax Romana)’라고 한다.


     그러나 2세기 말부터 정치가 혼란해지기 시작하여, 3세기에는 군대가 정치에 개입하여 황제를 마음대로 폐위하고 옹립하는 ‘군인 황제 시대’가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상공업과 도시의 쇠퇴, 게르만족 등 이민족의 침입으로 로마는 큰 혼란에 빠졌으며, 정복 전쟁이 끝나면서 토지와 노예, 전리품의 공급이 끊겨 경제는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도시와 상공업은 쇠퇴하여 중산층 자유 시민이 몰락하였고, 농촌에서는 부자유 소작인(콜로누스)이 토지를 경작하는 콜로나투스가 확산되었다.

 

 

로마 제국 영역 지도
출처 - MiraeN 고등학교 세계사

 

 

 

 

 

로마 제국의 멸망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개혁 정책을 펼쳤다. 그는 전제 군주제를 확립하고 제국을 4 분할하여 효율적인 통치를 꾀하였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크리스트교를 공인하는 한편, 제국을 하나로 합치고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는 등 제국의 부흥에 힘썼다.

     개혁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해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 사후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열되었고(395), 동로마 제국은 그 후에 약 1000년간 지속하였으나,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얼마 안 가 멸망하였다

 

 

 

 

크리스트교의 성립과 전파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의 속주가 된 유대 지방의 주민들은 구세주 메시아의 출현을 고대하였다. 이 시기에 등장한 예수는 유대교의 선민사상과 율법주의를 배격하고 민족과 신분을 초월한 신의 사랑, 평등, 인간애를 설교하였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자 유대교 지도자들과 로마는 위협을 느끼고 그를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예수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인 베드로와 바울 등을 통해 제국 전역에 전파되어 각지에 교회가 세워지고 『신약 성서』가 편찬되었다.

     다신교 국가인 로마는 처음에 크리스트교를 용인하였다. 그러나 유일신을 숭배하는 크리스트교도들이 황제 숭배를 우상 숭배라며 거부하자 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크리스트교가 확산하면서 박해는 더욱 심해졌으나, 크리스트교도들은 카타콤에서 예배를 보면서 신앙을 지속하였으며 교세는 더욱 확장되었다.

     결국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라노 칙령을 공포하여 크리스트교를 공인하였고(313), 이어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아타나시우스파를 정통으로 인정하며 삼위일체설에 기초한 정통 교리를 확립하였다(325).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이르러 크리스트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392). 이후 크리스트교는 유럽에 뿌리를 내려 그리스·로마 문화와 함께 유럽 문화의 근간이 되었다.

 

카타콤 사진
출처 - MiraeN 고등학교 세계사

 

 

 

 

실용적인 로마의 문화

     로마인은 그리스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를 수용하는 한편, 광대한 제국을 위지하고 관리해야 할 현실적 필요 때문에 법률, 토목, 건축 등 실용적인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하였다.

     로마가 후대에 남긴 최대의 유산은 법률이었다. 도시 국가의 관습법을 성문화한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은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시민법으로 발전하였고, 이어 제국의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이 주어지면서 제국 안의 모든 민족에게 적용되는 만민법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로마법은 6세기 비잔 티움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 집대성되어 훗날 세계 각국의 법체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로마는 정복지 곳곳에 계획도시를 세우고 물자 교류와 신속한 군사의 이동을 목적으로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하였다. 도시에는 수도 시설을 정비하고, 콜로세움, 판테온, 개선문, 공중목욕탕 등의 건축물을 세웠다.

 

콜로세움 사진
출처 - MiraeN 고등학교 세계사

 

     문학에서는 키케로가 산문 등의 분야에서, 베르길리우스가 시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철학에서는 헬레니즘 시대의 스토아학파가 로마의 상류 사회에 영향을 끼쳤으며,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철학자로서 『명상록』을 남겼다. 역사학에서는 리비우스의 『로마사』,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등이 저술되었다. 한편 천문학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가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돈다는 천동설을 주장하여 이후 중세의 공인된 학설이 되었다.

     로마는 합리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그리스・헬레니즘 문화를 수용하여 고전 문화를 완성하고 크리스트교라는 보편적인 유일신 신앙을 수용하였다. 이 두 가지 전통을 융합한 로마 문화는 그리스 문화와 더불어 서양 문화의 원류를 이루었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