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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세계사] 게르만족의 이동과 프랑크 왕국의 발전

게르만족의 이동과 프랑크 왕국의 발전 

 

썸네일 게르만족의 이동과 프랑크 왕국의 발전
게르만족의 이동과 프랑크 왕국의 발전

 

게르만족의 이동

     게르만족은 원래 발트해 연안과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살면서 수렵과 목축업에 종사하던 민족이었다. 점차 농경의 비중이 높아지고 인구가 증가하자, 따뜻하고 기름진 농경지를 찾아 남쪽으로 이동하여 로마 제국의 영토로 들어오게 되었다. 3세기 무렵에는 상당수의 게르 만족이 로마 제국 내에서 소작농이나 용병으로 활동하였고 점차 로마 문화에 동화되어 갔다.

     4세기 후반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인 훈족이 동부 유럽으로 이동해 오자,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이 대규모로 로마 제국 영내로 이동하였다. 이를 계기로 게르만족의 여러 부족이 이동하여 서로마 제국 곳곳에 나라를 세웠다. 이후 서로마 제국은 쇠퇴하다가 게르만족 출신의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였다(746).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서양 고대 사회는 종말을 맞이하고 중세 유럽 사회가 시작되었다.

 

게르만족의 이동 지도
출처 - MiraeN 고등학교 세계사

 

 

 

프랑크 왕국의 성립과 변천

     게르만족이 세운 왕국 중 갈리아 지방에 자리한 프랑크 왕국은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다. 대부분의 게르만 왕국들과는 달리 프랑크족은 본거지를 유지한 채 가까운 갈리아 지방에 정착하여 현지 적응이 쉬웠다. 또한 5세기말 클로비스는 메로베우스 왕조를 세우고 크리스트교의 정통파인 아타나시우스파(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하여 로마인과의 문화적 마찰을 피하고 융합을 꾀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프랑크 왕국이 유럽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클로비스가 죽은 후 내분이 일어나 왕권이 약화된 기회를 틈타 재상 격인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이 실권을 잡았다. 그는 피레네산맥을 넘어온 이슬람군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물리쳐 크리스트교 세계를 보호하였다(732). 이후 그의 아들 피핀은 메로베우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카롤루스 왕조를 개창하였다. 교황이 왕조 개창을 지지해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피핀은 롬바르드족(랑고바르드)의 공격으로부터 교황을 보호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얻은 이탈리아 중부 지역을 교황에게 기증하였는데, 이것이 교황령의 시초가 되었다.

     피핀의 아들인 카롤루스 대제 때 프랑크 왕국은 전성기를 맞았다. 그는 정복활동을 통해 옛 서로마 제국 영토의 많은 부분을 되찾았으며, 정복지에 선교사를 보내고, 곳곳에 교회를 세워 크리스트교 보급에 힘썼다. 또한 라틴어 문법, 논리학 등을 가르치는 궁정 학교를 세우고 수도원에서 고전을 연구하고, 필사하게 하는 등 문화발전에 힘써 ‘카롤루스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이에 그리스・로마 문화, 게르만 문화, 크리스트교가 융합한 중세 서유럽 문화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로써 로마 문화, 크리스트교, 게르만 문화가 융합되어 중세 서유럽 문화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한편 동로마 제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던 교황 레오 3세는 카롤루스 대제를 서로마 황제로 대관하여(800) 프랑크 왕국과 로마 가톨릭교회 사이의 유대를 다졌다.

     카롤루스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은 분할 상속에 따른 내분과 후계자들 간의 다툼 등 내분이 일어나 혼란을 겪었다. 결국 베르됭 조약(843)과 메르센 조약(870)에 의해 서프랑크, 중프랑크, 동프랑크로 분열되었다.

 

프랑크 왕국의 분열 지도
출처 - MiraeN 고등학교 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