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 변동과 시장 경제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 변동과 시장 경제 

 

썸네일 -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 변동과 시장 경제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 변동과 시장 경제

 

사회주의 계획 경제와 문화 대혁명

     오랜 항일전과 내전으로 중국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1949년 중화 인민 공화국 수립 후 중국 정부는 농업의 낙후성, 공업의 후진성, 극심한 인플레이션 등의 경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중국 정부는 토지 개혁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농민 대부분을 합작사에 가입시켜 농업의 집단화를 추진하였다. 또한 주요 기업을 국유화하고 생산 수단의 공유화를 제창하였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 경제 체제로의 개조를 추진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는 농업과 공업 생산의 대규모 증산을 목표로 경제의 비약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대약진 운동을 전개하였다. 농업 부분에서는 대규모 수리 관개 사업 시행 등에 중점을 두고, 자력갱생과 자급자족을 추구하였다. 또한 공동 생산을 위한 인민공사를 전국적으로 조직하여 전체 농가의 99%를 가입시켰다. 공업 부분에서는 재래식 용광로를 광범위하게 보급하여 철강의 증산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대약진 운동은 자원 배분의 비효율성, 집단화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과 생산 의욕 저하, 기술부족, 연속된 자연재해로 말미암은 생산력 저하와 대기근으로 인한 굶주림 등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류사오치 등은 집단화의 점진적 추진과 사회주의 경제의 수정을 요구하였다. 마오쩌둥은 이러한 요구를 자본주의 사상과 문화에 대한 추종이라고 비난하면서 홍위병을 동원하여 반대 세력을 제거하였다(문화 대혁명).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 실패로 약해진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데 문화 대혁명을 이용하였다.

 

 

 

 

개혁・개방과 고도성장

     중국의 사회주의 계획 경제는 1970년대 석유 파동을 맞으면서 구조적 취약점을 드러냈다. 생산재 수입을 위한 외화를 제때에 획득할 수 없었고 중앙 집권적 계획 경제로 대규모 국영 기업의 낭비와 부패, 비효율성이 날로 커졌다.

     이에 1976년 50만여 명의 노동자가 저우언라이 추도를 명분으로 톈안먼 광장에 모여 마오쩌둥을 비판하며 시위를 벌였다. 곧이어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문화 대혁명은 중단되었다. 1981년 중국 공산당은 문화 대혁명이 당, 국가, 인민에게 커다란 재난을 초래했고, 마오쩌둥이 오류를 범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새 지도자가 된 덩샤오핑은 1978년 농업, 공업, 국방, 과학 기술을 ‘4대 현대화 노선’으로 확정하여 이른바 ‘개혁·개방’ 정책을 취하였다. 이에 따라 기업 경영에 시장 경제적 요소를 도입하여 농촌에서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가족농업으로 전환하였으며, 농산물 가격을 점진적으로 시장에 맡겼다. 또 사기업의 설립을 허용하고, 국영기업 또한 차츰 민간에 매각하였다. 대외 개방 정책도 함께 진항하여 선전 등지를 경제특구로 지정, 외국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고 수출 확대에도 힘썼다. 이후 중국은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개혁·개방의 진전에 따라 정치 개혁의 목소리도 점차 커졌다. 1989년에는 학생, 시민, 노동자 등이 대규모로 모여 민주화를 요구하였다(톈안먼 사건). 중국 정부는 이를 ‘폭력적 난동’으로 규정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덩샤오핑은 1992년 선전·상하이 등 남쪽 지방을 시찰하면서 시장 경제 도입과 개혁을 촉구하였다(남순강화). 이에 따라 중국은 개혁·개방에 다시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중국은 매년 10%에 가까운 고도성장을 지속하여 '세계의 공장'이라 불렸고, 2001년에는 세계 무역 기구(WTO)에도 가입하였다. 2010년에는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였다. 

 

상하이 푸동 지구
출처 - MiraeN 고등학교 동아시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