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의 경제 발전과 민주화
타이완의 경제 발전
중국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하고 타이완으로 건너간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은 1949년 이후 계속 계엄 통치를 시행하면서 경제 개발에 힘을 쏟았다. 1950년대 초반에는 통화 개혁과 함께 긴축 재정 정책을 시행하였다. 나아가 수출에 의한 외형적 발전보다는 국내 시장 개발과 경공업 중심으로 수입 대체 정책에 중점을 두었다. 또한 민생 안정과 장기적 경제 발전을 위해 농업 부문의 육성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대대적인 농지 개혁을 통해 토지를 얻은 농민의 생산 의욕을 높였다. 그 결과 타이완은 공업 발전을 위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타이완은 경제 건설 4개년 계획을 차례로 시행하면서 전력·비료·방적·제강·제당 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였다. 1965년 미국의 경제 원조가 중단된 이후에는 수출 촉진 정책을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그 결과 1960년대에 타이완의 연간 실질 수출 신장률은 18.2%에 이를 정도였다. 이후 타이완은 ‘아시아의 작은 용’이라 불리며 신흥 경제국으로 부상하였다. 미·중 수교 이후 타이완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지만, 정부의 투자 장려책과 제조업 육성 정책으로 경제 성장을 이끌어 갔다.
타이완의 민주화 운동
경제 성장이 급속하게 이루어지는 가운데 타이완 국민은 국민당의 일당 독재를 비판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타이완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잡지사 메이리다오[美麗島]는 1979년 12월 10일 ‘세계 인권의 날’을 맞이하여 타이완 인권 위원회 발족을 위한 집회 허가 신청을 하였다. 그러나 정부가 이를 허가하지 않자 행사를 강행하려던 주최 측과 경찰 사이에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났다. 타이완 남부의 대도시 가오슝시에서는 3만 명이 넘는 시위대가 경찰의 과잉 진압에 항의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150여 명의 인사가 체포되어 군사 법정에서 국가 반란죄 등으로 징역 15~20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타이완에서 민주화 운동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국민당 정부가 1987년 계엄령을 해제하고 이어서 총통 직선제와 다당제를 시행함으로써 위로부터의 민주화를 원만하게 추진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급격한 부상과 함께 타이완 내부에서는 타이완의 독립을 추구하는 민진당과 하나의 중국을 고수하는 국민당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그리하여 타이완에서는 경제 정책의 실패와 맞물려 양당 사이에 정권 교체가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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