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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농경과 목축

농경과 목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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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과 목축

 

농경과 농경민의 생활

     기온과 강수량 등의 기후는 작물의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연 강수량이 400mm가 넘는 지역에서는 농경 생활이 이루어졌다. 농경 지역은 다시 기온과 강 수량에 따라 논농사 지역과 밭농사 지역으로 나뉘었다.

     중국의 화중·화남 지역과 산둥반도의 해안가, 한반도의 남서부, 일본의 혼슈와 규슈 지역에서는 주로 논농사가 이루어졌다. 특히 중국의 화남, 일본의 규슈 남부 등지에서는 1년에 벼를 두 번 재배하는 이기작이 가능하였다. 이곳보다 강수량이 적은 화북 지역, 만주, 한반도 북부 등지에서는 주로 밭농사가 이루어졌다.

     밭농사는 기원전 8000년경에 황허강 유역의 황토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주로 조, 수수, 기장, 콩 같은 곡물을 길렀는데, 이들은 생육 기간이 짧고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장점이 있었다. 농경 초기에는 생산이 충분하지 않았으므로 채집과 수렵, 어로 등을 병행하고 가축을 길러 그중 일부를 보조 식량으로 삼았다.

     벼농사는 기원전 6000년경에 기온이 높고 강수량이 풍부하며 늪지가 많은 창장강 중·하류 지역에서 시작되어 베트남, 한반도, 일본 열도 등으로 전파되었다. 벼는 다른 작물에 비해 단위 면적당 생산성이 높은 작물이면서 인체에 필요한 필수 영양소를 고루 갖추어 동아시아 사람들의 주식으로 자리 잡았다.

     농경민은 계절에 맞추어 씨를 뿌리고 곡물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또 물을 확보하기 위해 저수지, 제방 등의 대규모 치수 사업 등 공동 노동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모여 정착 생활을 하였다. 농번기에 주민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위한 조직이 발달하여, 이 과정에서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나타나 일찍부터 중앙 집권적인 권력이 출현하고 국가 조직이 만들어졌다.

 

 

 

 

수렵과 어로 생활

     동아시아 지역의 사람들은 주로 농경이나 목축을 통해 식량을 얻었으나 지역에 따라 수렵과 어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 북부 지역에 넓게 분포한 삼림 지대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서식하였다. 그래서 이 지역의 주민들은 농경만으로 충족하기 어려운 식량 자원을 수렵을 통해 보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수렵 활동은 농업의 비중이 커진 후에도 농한기인 겨울철에 이루어졌다.

     큰 강 주변과 해안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농경과 더불어 어로 생활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 지역에서는 조개 채취나 물고기잡이가 이루어졌으며, 일보 지역에서는 고래를 사냥하기도 하였다. 강가나 해안가의 집터 유적 근처에서는 식량으로 섭취하고 남은 조개더미가 발견되어 당시의 생활 모습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목축과 유목민의 생활

     연 강수량이 400mm 이하이고 기온이 낮아 곡물 재배가 어려운 내륙의 고원 및 초원 지대에서는 주로 목축이 이루어졌다. 목축은 다시 가축의 사육 방식에 따라 일정한 구역 안에 가축을 풀어놓고 기르는 방목과 계절에 따라 이동하면서 가축을 기르는 유목으로 나뉜다. 방목하는 사람들은 정착 생활을 하므로 농경을 일부 병행하였다. 반면 유목민은 가축에게 먹일 물과 풀을 찾아 겨울 숙영지와 여름 숙영지를 정기적으로 오가며 양, 염소, 말, 소, 낙타 등을 길렀으며 조립과 분해가 쉬운 이동식 가옥에서 거주하였다. 

     유목민은 수렵을 통해 생계를 보조하였다. 주로 활과 매를 이용하여 새, 토끼, 여우, 사슴 등을 사냥하여 식량으로 삼았다. 유목민에게 가축을 떼레야 떨 수 없는 존재였다. 삶에 필요한 생필품을 가축으로부터 얻었다. 가축의 젖과 고기, 젖을 가공하여 만든 유제품을 먹고, 가죽과 털을 이용하여 의복이나 게르 등을 만들었다. 또 가축의 뼈와 뿔을 이용하여 각종 물건을 만들었고, 배설물을 말렸다가 연료로 이용하였다. 낙타와 소 등은 주로 물건을 운반하는 데 활용되었으며, 말은 사람의 이동 수단과 전투 수단으로 중요시되었다. 

     유목민은 평소 부족 단위로 생활하였으며 부족장의 권한이 강하였다. 반면에 이들을 통제할 군주권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군주권의 세습도 부족장들의 추대를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뛰어난 기마 능력과 전투 능력을 바탕으로 흩어진 부족을 통합하고 강력한 유목 국가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유목 국가를 세운 것은 흉노였다. 흉노는 진·한 대에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초원 지대를 장악하여 북방의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흉노 이후에도 돌궐, 위구르, 몽골 등이 유목 국가를 세웠다. 특히 몽골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유라시아 지역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동아시아에서 활동한 북방 민족 대부분은 유목 민족이었지만, 그중에는 여진과 같은 수렵 민족도 있었다. 여진은 금과 후금(청)을 건국하였다. 

 

 

 

 

농경 사회와 유목 사회의 교류

     평상시에 농경민과 북방 민족은 상호 협력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유목민은 가죽·모피·말 등을 농경 지역의 곡물·차·황금·비단·무명·누룩 등과 바꾸는 형태로 교역하며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보완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농경민이 경작지를 확보하기 위해 유목민의 목초지 주변을 침략하기도 하였다. 유목민 역시 곡식, 채소와 같은 물품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을 때 농경 지역을 약탈하기도 하였다. 유목민에게 약탈은 물자를 손쉽게 얻는 방법이었지만 일회성이라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농경 사회를 정복하는 일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유목민은 농경민을 군사적으로 위협하여 정기적인 공납을 수취하는 방법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기후 변화로 농경 지역과 유목 지역의 경계가 이동하면서 생활 근거지가 변하기도 하였다. 이때에는 농경민과 유목민이 생활 근거지를 놓고 충돌하였다.

     역사 속에서 농경민과 유목민은 서로를 비판하거나 얕잡아 보기도 하였다. 농경민은 유목민을 약탈을 일삼고 도덕성을 갖추지 못한 야만인으로 인식하였다. 반면에 유목민은 농경민을 땅에 얽매여 사는 부자유스러운 존재로 인식하였다. 농경민과 유목민의 생업의 차이와 사회의 이질성은 동아시아 전체의 사회 변동과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농경과 유목은 문화의 우열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자연환경에 맞춰 오랜 시간 효율적으로 적응한 결과 나타난 생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