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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국가기념일]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 (4월 28일)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忠武公誕辰日)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의 탄신일을 기념하고 충무공 이순신애국과 숭고한 충의를 길이 전승하며 민족자주정신을 선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정된 날입니다. 충무공 이순신의 탄신일인 1545년 4월 28일을 기념해 제정했고, 올해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제479주년 탄신일입니다. 

 

썸네일 -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

 

유래 및 역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행사는 그가 전사한 직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조선 선조는 경남 통영에 사당을 세워 제사하도록 했고, 효종 때 남해도 노량에, 숙종 때 아산에 사당을 세웠습니다. 정조는 이순신에게 의정부 영의정을 추증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1945년 이후 충무공기념사업회 주관으로 매년 4월 28일 탄신제전을 올렸으며, 1960년대부터는 이순신을 구국의 영웅이자 애국군인의 표상으로 삼으며 본격적으로 기념 행사를 거행하였습니다.

     1966년 4월 충남 아산 현충사의 성역화 사업이 추진되었고, 1967년 1월, 문교부령으로 4월 28일을 '이충무공 탄신기념일'로 제정하였고, 1968년에는 서울 광화문에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충무공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1973년 3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으로 '충무공 탄신일'을 법정기념일로 제정했습니다. 1980년 해군에서 임진왜란 당시 원형을 그대로 복원한 거북선을 최초로 건조하였으며, 1998년에는 충무공 순국 400주년을 맞아 충남 아산에 동상이 건립되는 등 1980년대 이후에도 기념사업은 지속적으로 이어졌습니다. 

     2013년 6월 17일에 충무공 탄신일을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로 명칭을 변경했습니다. 

 

 

 

 

충무공 일생

 

 소년시절 

 

     이순신은 1545년 4월 28일(음력 3월 8일) 서울 건천동에서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이순신 사후 조카 이분이 쓴 행록』에는 "어려서 놀 때도 늘 전쟁 놀이를 하는데 모든 아이들은 반드시 공을 장수로 떠받들었다. 처음에는 두 형을 따라 유학을 배웠는데 재주가 있어 성공할 만도 했으나 매양 붓을 던지고 군인이 되고 싶어 하였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청년시절_첫 무과시험에서 낙마 

 

     이순신은 혼인 후, 장인 방진의 영향으로 무관이 되어 나라에 충성할 것을 다짐합니다. 28세가 되던 해(1572년) 무과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마하여 왼쪽 다리가 골절됩니다. 이때 이순신은 옆에 있던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다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끝까지 시험에 응했습니다. 

 

 함경도에서의 무관시절_여진족을 무찌름 

 

     이순신은 43세 때(1587년) 함경도 조산보 만호와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여진족들이 쳐들어와 우리 백성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습니다. 이순신은 이 여진족을 토벌하면서 우리 포로들을 구출하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병사 이일의 허위보고로 백의종군의 억울한 처분을 받았습니다. 

 

 전라좌수사시절_거북선 건조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14개월 전인 1591년 2월 전라좌수사로 부임하게 된다. 공은 장차 일본군이 쳐들어 올 것을 예견하고 군사 훈련과 시설보수 등을 강화하여 전쟁에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여러 해전 승리의 주역이었던 거북선을 완성하였다. 

 

 부산해전_연전연승 

 

     임진왜란 발발 후 만반의 준비를 갖춘 덕에 이순신은 여러 해전에서 연승을 거둡니다. 이후 1592년 9월 1일 부산 절영도 앞바다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는데 이를 '부산해전'이라 합니다. 부산해전은 다른 해전과는 달리 적의 본진으로 직접 들어가 대규모 함대를 포격하는 공세적인 작전이었다. 이순신 스스로도 장수와 군졸들의 공로에서 부산해전이 가장 큰 싸움이었다고 징계할 정도였습니다. 

 

 삼도통제사 시절_한산도 생활 

 

     이순신이 이전한 한산도는 곧 삼도수군통제영이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일본군과의 싸움에 대비하여 수군확보, 둔전경작, 무과실시 등을 통해 군사력을 증강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이순신이 남긴 일기와 장계, 그리고 임금이 내린 여러 건의 유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충무공의 효성 

 

     이순신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남달랐습니다. 전란 중에도 여수 본영에서 가까운 곳에 모시어 어머니의 인후를 살피곤 했었습니다. 더욱이 2차 백의종군 당시에는 어머님의 죽음을 접하고도 상을 제대로 치루지 못한 채 전쟁터로 나아가며 마음 아파하는 심정이 곳곳에 나타나있습니다. 

 

 죄인의 몸 

 

     1597년 2월 6일 선조는 이순신을 잡아오라고 명령합니다. 그 죄는 조정을 기망하고, 적을 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선조의 노여움이 심하여 도체찰사 이원익과 서애 유성룡조차 감히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우의정 정탁이 이순신을 구명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는 선조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도 이순신이 이룬 그간의 공적과 이번 사태의 원인이 된 조정의 출격명령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명확하게 해명하면서 구명을 호소하였습니다. 이는 다행히도 선조의 마음을 움직였고 이순신은 옥에서 나와 도원수 권율 막하에서 백의종군을 하도록 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통제사 재임명_명량대첩 

 

     이순신이 옥에서 풀려나와 백의종군 하던 칠천량에서 원균은 일본군에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수군은 겨우 12척의 배가 남아있었고, 군사들을 아직 칠천량해전의 패배에서 받은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서해안 길목 진도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순신은 부하 장병들을 불러 모아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말로 독려하고 전투에서는 스스로 맨 앞에 나가 싸웠습니다. 13척의 배로 130척이 넘는 적선을 무찌른 이 전투가 그 유명한 울들목해전 곧 명량해전입니다. 일본군은 명량해전의 패배로 서해바다를 통해 북진하려는 작전을 포기해야 했고 조선은 정유재란의 승기를 잡게 됩니다. 

 

 충무공의 최후_노량해전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군이 곧 철수 할것이라는 정보가 전해지면서 전란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일본군측은 철군준비에 들어갔으며, 명나라는 자신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이를 묵인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이를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순신의 끊임없는 설득에 명나라 해군제독 진린은 마음을 돌리게 되었고 일본군의 해로를 봉쇄하기로 합니다. 이에 1598년 11월 18일 조명연합수군은 노량해협으로 오는 일본군 함대를 맞아 전투를 벌였으니 이 전투가 노량해전입니다. 치열한 접전 끝에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었지만, 이순신은 적의 총탄을 맞아 전사하고 맙니다. 이때는 이순신이 54세 되던 해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이 해전을 마지막으로 7여 년간의 임진왜란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난중일기

     이충무공의 『난중일기』는 국보 제76호이고, 2013년 6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난중일기』는 이순신(1545~1598) 해군사령관이 임진왜란(1592~1598) 기간 중 군중(軍中)에서 직접 쓴 친필 일기로 임진왜란 발발(1592년 1월) 이후부터 이순신이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직전까지 7년의 기간을 망라하여 군중 생활을 기록했습니다. 

     『난중일기』는 원래 임진일기(1592년), 계사일기(1593년), 갑오일기(1594년), 을미일기(1595년), 병신일기(1596년), 정유일기(1597년), 속정유일기(1597년), 무술일기(1598년)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1595년의 을미일기를 뺀 총7책이 보존되어 전해오고 있습니다.

 

난중일기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난중일기』는 개인의 일기 형식의 기록이지만, 전쟁 기간 중 해군의 최고 지휘관이 직접 매일 매일의 전투 상황과 개인적 소회를 현장감 있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나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록물입니다. 또한 전투상황에 대한 상세한 기록뿐 아니라 당시의 기후나 지형, 일반 서민들의 삶에 대한 기록도 전하고 있어 과거의 자연지형 및 환경, 서민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문장이 간결하면서도 유려하며,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국민이 애송하는 시(詩)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문학사적 가치도 매우 높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의 3대 대첩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및 행사

제63회 성웅 이순신 축제

- 일정 : 2024 4. 24.(수)~4. 28.(일)

- 장소 : 이순신종합운동장, 현충사, 곡교천, 온양온천역 일원 등

- 문의 : 아산시 콜센터 1422-42

 

 

2024 제63회 통영한산대첩축제

- 일정 : 2024. 8. 9.(금)~8.14.(수) / 6일간

- 장소 : 통영시 일원

 

 

충무공이순신 기념관

- 현충사 - 충남 아산

 

 

세종이야기・충무공이야기

- 전시관 -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

-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