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280) 썸네일형 리스트형 [24절기] 소서_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날 소서(小暑) 소서(小暑)는 24 절기 중 11번째 절기로 태양의 황경이 105°에 드는 때입니다. 양력으로 대개 7월 6일~7월 7일인데 올해는 7월 6일이고, 하지와 대서 사이에 있습니다. '작은 더위'라고 불리며,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됩니다. 기후 이 시기에는 장마전선이 우리나라에 걸쳐 있고, 이 무렵부터 올라오는 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많이 내라고 습도가 높아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풍속 소서가 시작되면 하지 무렵에 끝낸 모내기의 모들이 뿌리를 내려 논매기를 했습니다. 요즘은 제초제를 뿌립니다. 가을 보리를 베어낸 하지 무렵에 심은 콩이나 팥, 조밭의 김을 매 줍니다. 농가에서는 논둑이나 밭두렁에 풀을 베어 농작물에 영양을 주는 퇴비를 마련하고 논두렁의 잡.. [동아시아사]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 변동과 시장 경제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 변동과 시장 경제 사회주의 계획 경제와 문화 대혁명 오랜 항일전과 내전으로 중국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1949년 중화 인민 공화국 수립 후 중국 정부는 농업의 낙후성, 공업의 후진성, 극심한 인플레이션 등의 경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중국 정부는 토지 개혁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농민 대부분을 합작사에 가입시켜 농업의 집단화를 추진하였다. 또한 주요 기업을 국유화하고 생산 수단의 공유화를 제창하였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 경제 체제로의 개조를 추진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는 농업과 공업 생산의 대규모 증산을 목표로 경제의 비약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대약진 운동을 전개하였다. 농업 부분에서는 대규모 수리 관개 사업 시행 등에 중점을 두고, 자력갱생과 자급자족을.. [동아시아사] 타이완의 경제 발전과 민주화 타이완의 경제 발전과 민주화 타이완의 경제 발전 중국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하고 타이완으로 건너간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은 1949년 이후 계속 계엄 통치를 시행하면서 경제 개발에 힘을 쏟았다. 1950년대 초반에는 통화 개혁과 함께 긴축 재정 정책을 시행하였다. 나아가 수출에 의한 외형적 발전보다는 국내 시장 개발과 경공업 중심으로 수입 대체 정책에 중점을 두었다. 또한 민생 안정과 장기적 경제 발전을 위해 농업 부문의 육성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대대적인 농지 개혁을 통해 토지를 얻은 농민의 생산 의욕을 높였다. 그 결과 타이완은 공업 발전을 위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타이완은 경제 건설 4개년 계획을 차례로 시행하면서 전력·비료·방적·제강·제당 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였다. .. [국가기념일] 6.25전쟁일 제정 및 6.25전쟁 연표, 참전국 알아보기 6・25전쟁일 6.25전쟁일은 후세들에게 6.25전쟁의 참상과 교훈을 상기시키고, 참전용사의 위훈과 명예를 선양하며, 국민의 호국정신 및 안보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6.25전쟁일 제정 휴전 이후 국방부, 문공부 주관 6.25기념일 행사를 거행해 오다가, 1973년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해 법정기념일로 제정되었습니다. 6.25전쟁 배경, 전개 및 영향 [한국사] 6・25 전쟁6・25 전쟁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지금 제 옆에는 수많은 학우가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드는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1950년 8월, 학도 의용군 이bigdipper.tistory.com 6.25전쟁 연표 1948.. [동아시아사] 한국의 경제 성장과 민주화 운동 한국의 경제 성장과 민주화 운동 이승만 정부의 장기 집권과 4・19 혁명 한국은 남북 분단과 6·25 전쟁으로 경제 혼란이 계속되었다. 특히 전쟁으로 산업 생산 시설이 대부분 파괴되어 큰 타격을 입었다. 이승만 정부는 전쟁 이전에 단행하였던 농지 개혁을 이어서 추진하는 한편, 미국의 원조 물자에 의존하여 제분·제당·섬유 등의 소비재 공업을 발전시켰다. 한편 이승만 정부는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장기 집권을 시도하였다. 이에 맞서 학생을 비롯한 국민이 민주주의의 실현을 내걸고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렸다(4·19 혁명). 그러나 4·19 혁명으로 수립된 장면 정부의 민주당 정권은 국민의 통일과 민주화 여망을 실현해 보지도 못한 채 5·16 군사 정변(1961)으로 무.. [동아시아사] 일본의 고도성장과 55년 체제 일본의 고도성장과 55년 체제 고도성장과 55년 체제의 성립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뒤 경제 정책의 혼선과 물자 부족으로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미·소 중심의 냉전 질서가 형성되면서, 일본을 반공의 보루로 삼고자 하는 미국의 경제・군사적 지원에 힘입어 다시 도약할 기회를 얻었다. 특히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군수 물자 공급 기지로서 산업 생산량을 늘려 전쟁 특수를 누렸다. 일본은 1955년부터 1973년까지 연평균 10 % 이상의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이 시기의 고도성장으로 일본은 미국 다음가는 ‘경제 대국’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이 시기 일본의 경제 구조는 중공업과 전자 산업 위주로 전환되었다. 한편 1951년에 미·일 안보 조약.. [동아시아사] 냉전 체제의 변화와 동아시아 냉전 체제의 변화와 동아시아 냉전의 완화 1960년대 후반부터 냉전 체제는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당시 미국은 냉전 체제를 뒷받침하는 데 필요한 군비 확장과 대외 원조, 베트남 전쟁 비용 등으로 심각한 재정 부담과 반전 시위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던 1969년, 새로운 미국 대통령으로 닉슨이 취임하였다. 닉슨 대통령은 ‘아시아의 문제는 아시아인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라는 새로운 대외 정책의 원칙을 밝혔다. • 미국은 앞으로 베트남 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 • 강대국의 핵에 의한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하여 아시아 각국 이 스스로 협력하여 그에 대처하도록 한다. - 닉슨 독트린 - 이후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군대.. [동아시아사] 동아시아의 국교 회복 동아시아의 국교 회복 냉전과 동아시아 국제 관계 동아시아의 전후 처리는 미국이 주도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체결을 통해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전쟁 책임과 피해국에 대한 배상 문제로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다. 또 중국, 한국 등의 피해국들은 회의에 참가하지 못하였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 국가들은 조양 서명을 거부하였다. 이에 동아시아 국가 간의 국교 회복은 여전히 미해결의 과제로 남았다. 한국과 일본의 국교 수립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중화민국(타이완)과 일본이 화·일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가장 먼저 국교를 회복하였다(1952). 한국과 일본도 1952년부터 국교 수립을 위한 회담을 시작하였지만,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둘러싼 의견 차이로 회담은 계속 결.. 이전 1 2 3 4 5 ··· 35 다음